[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12]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배고파'를 외치던 다울이가 요샌 조용하다. 일어나자마자 후딱 옷부터 갈아입고 밖으로 튀어 나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딜 다니러 갔는지 아침 먹자고 불러도 대답이 없고, 한참 뒤에야 바지가 다 젖은 채로 나타나 빙긋이 웃는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야?"

"신선못 공사 현장에 다녀왔어요. 어제까지 둑을 새로 만들었는데 밤에 비가 와서 둑이 잠겼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손을 봤더니 진짜 멋져요. 엄마도 한번 가 볼래요?"(얼마 전부터 다울이는 나와 신랑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다. 사연이 있지만 다음 기회에....)

"신선못? 아, 너희들이 요즘 한창 노는 데 말이지?"

그렇다. 아이들은 요즘 골목길 질주 놀이(씽씽이, 친구빠빵,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신나게 달리는 놀이)가 시들해졌는지 영역을 넓혀서 수봉 할머니 논 아래쪽 냇가까지 가서 놀고 있다. 처음엔 섬을 만든다며 돌을 옮기고 흙을 쌓고 난리더니, 어느새 연못 만들기에 들어갔나 보다.

"이따 논에 가면서 볼게. 아빠가 논에 일이 많다고 해서 말이야. 허리 아픈 사람이 끝끝내 논농사를 짓겠다고...."

나도 모르게 다울이한테까지 하소연을 늘어놓을 뻔했다.(올해는 논농사라도 쉬었으면 했는데 다울 아빠가 이제 허리가 좀 나아졌다며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해 보겠단다. 황소고집을 꺾을 순 없는지라 그러마 했지만, 못마땅함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신랑이 무리하지 않도록, 나와 아이들이 농사일을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수밖에.... 올해는 농사 안식년을 갖고 홀가분하게 놀아 볼까 했더니 되려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투입되게 생겼다.)

"이제는 아빠 혼자 농사짓기 힘든 거 알지? 그렇다고 농사를 안 지을 수도 없고 말이야. 무슨 일이든 우리가 함께 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다같이 장화 챙겨 신고 논으로 출발! 비온 뒤라 냇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냇물 따라 걸으며 어제보다 더 짙어진 숲을 바라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핫플레이스 신선못에 다다라 그 깜찍한 자태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일 좀 시키면 힘들다 배고프다 말 많은 녀석들이 무거운 돌들을 버쩍버쩍 들어 만들어 놓은 멋진 놀이터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돌 옮기고 흙 쌓고 하느라 힘들었겠네. 안 힘들었어?"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요."

"맞아. 다울이 형아는 힘 쎄거든."

옆에서 다나도 한마디 거드니 더욱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럼 논에 가서 힘 좀 써 볼까?"

"에엥, 여기서 놀다 가고 싶은데...."

아이들의 개울 놀이터 앞. 오늘 아침엔 신선못을 지키는 수호신을 만들었다고.... (물가에 우뚝 솟은 검은 돌이 수호신) ⓒ정청라

금세 울상이 되어 버린 다울이를 못 본 척하고 논을 향해 걷는다. 가는 내내 찔레 순 따 달라 하는 다나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다울 아빠보다 한참 늦게 도착을 해서 보니, 다울 아빠는 벌써 작두로 볏짚을 썰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살살해, 살살! 나는 뭐 하면 돼요?"

"저쪽에 작두 하나 더 있잖아요. 그걸로 볏짚 썰어요. 다울이랑 다랭이는 여기저기 밟고 다니면서 논에 풀 좀 뽑으라고 하고...."

내키지 않지만 작두를 들고 질척한 논으로 들어가 볏짚을 썬다. 1단계, 논물에 흠뻑 젖은 볏짚을 한 움큼 들어 올려 작두대 위에 올려 놓는다. 2단계, 칼날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며 힘차게 볏짚을 썬다. 방법은 간단한 것 같은데 막상 해 보니 쉽지가 않아 짜증이 났다. 볏짚이 작두대 틈새에 끼어 버리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잘 썰리지도 않을 뿐더러 끼어 있는 볏짚을 빼내는 수고도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게 모두 볏짚이 논물에 젖어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고 신랑 들으라는 듯이 쏘아붙였다.

"이런 일은 진작에 했어야지. 볏짚 상태가 안 좋으니까 잘 썰리지도 않네."

"뭐라구요? 잘만 썰리는데? 볏짚을 작두대 위쪽으로 바짝 붙이고 썰어 봐요."

그러면서 시범을 보여 주는데 '싹뚝! 싹뚝!' 시원하고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볏짚 썰리는 소리라니.... 이상하다 생각하고 말해 준 대로 해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감을 잡았다. 그러자 짜증도 사라지고 일이 재밌어지는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거칠거칠 벌거숭이 느낌의 일맛!

내가 그렇게 작두와 친해지는 사이,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다랑이는 논에서 넘어져 옷꼴이 엉망진창이 되고, 다나는 집에 가고 싶다 노랠 부르고, 다울이는 시킨 일은 안 하고 논흙으로 장난만 치고 있으니 말이다.

"다울아, 동생들은 그렇다고 쳐도 너는 이제 일 좀 해야 되지 않을까?"

"엄마, 나 지금 둑 만들고 있어요. 논에 물 흐름이 좋아지게 공사하는 거란 말이에요."

과연 자세히 들여다보니 골풀 심어 놓은 곳 주변으로 둑을 만들어 물길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각종 흙장난은 물론이요 냇가에서 놀아 본 가락까지 있어서인지 둑 만드는 솜씨가 제법이었다.(역시 노는 게 힘?!)

"대단하네. 대단해. 앞으로 논둑 정비나 둑 만드는 일은 다울이한테 맡겨야겠다. 그나저나 지금은 볏짚 좀 논에 뿌려 줄래?"

"네!" (대답은 잘도 해 놓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논둑 작업에 빠져들었음)

그렇게 우리는 함께 일하며 놀았다. 비릿하게 느껴지던 논흙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질 때까지... 우당탕퉁탕 엄마야아빠야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일맛도 배우고 함께 있음의 든든함을 깨닫는 우리 가족의 오늘! 이 오늘이 참 좋은 데로 흘러가고 있음을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좋은 동시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중 마음에 들어온 시 한 편이 권정생 선생님의 '개울물'이다.
노래로 만들어 부르니 훨씬 실감나고 재미있다.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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