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5월 19일(부활 제5주일) 사도 14,21-27; 묵시 21,1-5; 요한 13,31-35

부활시기 동안 내내 우리는 생명을 기념한다. 생명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요즈음의 주일날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복음서는 생명과 사랑이라는 두 주제들을 연결시킨다. 우리는 “믿음의 문”(사도 14,27)을 통하여 이 관계를 들어간다.

주님을 현존케 하면서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분의 가르침의 요약을 그들에게 남긴다고 말한다. 주님은 곧 떠나갈 것이고, 그분은 추종자들이 직면하게 될 도전들에 관하여 의논을 즉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이 그분에게서 받은 “새로운 계명”, 즉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대로 너희들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사도 13,34)에 따라 살게 될 때에 계속하여 그들 사이에 계실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 예수님이 첫 번째로 언급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영원한 창조이고, 매일의 개혁이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가서 다른 사람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만드는 지속적인 추구의 길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모든 때에 현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길은 바로 사랑이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예수님을 모든 때에 현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길은 바로 사랑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우리가 그분이 했던 것처럼 사랑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전적인 사랑으로서, 보잘것없고 억압받는 이들과의 특별한 연대에 의하여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다스림이 항상 현존하고, 불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책임 있는 이들을 고발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이”: 이중대화 없기, 권력가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기, 명예나 편리함을 추구하지 말기, 침묵을 묵인하지 말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체적 사랑을 우리의 가르침과 결단의 모범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비참한 현실이 제기하는 도전들 앞에서 우리의 결단을 다져야 한다.

새로운 땅

오직 순수하고 결단을 내린 사랑의 증언만이 지금 존재하는 것, 낡은 땅(묵시 21,4)을 바꿀 수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구체적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굶주림과 차별로 매맞은 이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두 번째로 그날을, 묵시록이 이사야서 25장 8절의 아름다운 구절을 가리키며 암시했듯이 -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줄”(묵시 21,4) 그날을 선언할 것이다. 그때에 그분은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 결과로 주님을 우리들 사이에 현존하지 못하게 했던 그들을 거부할 것이다.

우리 각자는, 전 교회는 “믿음에 충실하라”(사도 14,22)고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길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우리의 편협함을, 세상에서 대접받으려는 욕구를 놓아 버려야 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며 교회의 요원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특권들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왔다. 우리가 그분이 했던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로서 우리 존재 자체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특히 기본 생존권이 박탈되고 짓밟혀 버린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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