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5월 19일(부활 제5주일) 사도 14,21ㄴ-27; 묵시 21,1-5ㄴ; 요한 13,31-33ㄱ.34-35

이번 주일 2독서로 제시된 요한 묵시록 21장은 묵시록의 마지막을 향해 인도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묵시록의 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와 동시에 언급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의 ‘사라짐’입니다.(묵시 21,1)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서 그것도 이사야서 3부에 유일하게 등장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2서와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드문 표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만드실 공간이었습니다.(이사 66,22)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몸담고 사는 곳인 땅과 하늘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을 새로 창조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첫 번째 하늘과 땅의 소멸을 전제로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신약에 이르러 베드로2서의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2-13)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맞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유다에게 빵을 적셔 주신 주님, 그리고 그 빵을 받고 나간 유다. 그렇게 유다가 나간 뒤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영광스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요한 13,33) 인간적인 마음으로 보았을 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시는 것이 유익해 보입니다. 항상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그렇게 계속 머무르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라짐’을 예고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이 이 땅을 떠나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께서 떠나셔야 새로움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공동체도 비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부활시기 동안 미사 전례 때 주일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첫 번째 독서로 계속 사도행전을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주일과 대축일의 첫 번째 독서는 구약성경의 자리입니다. (미사 독서 목록 지침 66항: 첫째 독서는 구약에서 읽고, 둘째 독서는 사도서, 곧 전례시기에 따라 서간이나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 셋째 독서는 복음을 읽는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은 파스카 신비로 기념하는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난다.) 하지만 부활시기 만큼은 예외입니다. 부활시기에 첫 번째 독서에 사도행전이 들어선다는 것은 교회를 이루고 유지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음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미사 독서 목록 지침 74항: 부활 시기에 사도행전을 읽는 전통은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파스카 신비에서 교회의 모든 삶이 시작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셨기에 새롭게 채워질 수 있었던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이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섭리로 이어지는 신앙의 역사를 우리는 오늘날에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려봅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 무언가를 하려고만 합니다. 반대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없애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주저합니다. 본당을 비롯한 신앙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 무엇을 채워 나가려고만 하지 비워 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각종 회의나 모임 자리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무엇을 어떻게 없앨까?’라는 이야기는 듣기 힘듭니다. 매년 해 오는 본당의 이러저러한 행사들, 그 속에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계속 늘어만 날까? 왜 계속 채워지기만 할까?’ 기존에 해 왔던 것에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추가시키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면 분명 너무 넘쳐서 힘들고 지칠 때가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워 내자고, 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면 내가 열심한 신앙인이 아닐까 오해받는 것이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 없애고 지워 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없애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분명 한계가 있기에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는 비워 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내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비워 내야 할 것, 없애 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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