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5월 26일(부활 제6주일) 사도 15,1-2.22-29; 묵시 21,10-14.22-23; 요한 14,23ㄴ-29

종교마다 자신을 대표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불교는 ‘자비’를, 그리스도교는 ‘사랑’, 힌두교는 ‘진리’, 이런 식이었다. 어렸을 때 각인된 이 문구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내가 믿는 신은 사랑의 신이며, 모든 신도는 서로 사랑한다면서 ‘사랑’을 그리스도교의 전유물로 여겼다. 나이가 들어 수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어느새 점점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일이 줄어들었다. 사랑의 진짜 전문가들은 교회가 아니라 모두 가요계에 몰려 있는 듯했다. 그들은 진심, 모든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멋진 곡과 시적인 가사를 호소력 있게 창작해 내는 귀재들인 것이다.

가요든 팝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사랑의 테마가 세계의 대중성을 호흡할 수 있는 것은 그 노랫말과 이야기들이 지닌 힘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어느 날,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어느 골목 길의 낡은 시간들을 일제히 떠올리게 한다. 소환된 기억들은 찬란한 봄이기도 하고, 겨울이기도 하다가 한 편의 ‘시’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게 기억은 고향이며, 오래 묵혀 둔 사진첩처럼 삶의 일부로 살아온 것이다. 어쩌면 켜켜이 숨어 있는 이런 기억이 강퍅하고 숨 막히는 현실로부터 숨쉬게 하는 구원투수였는지도 모르겠다. 혁명가든 예술가든 우리 모두는 그 치열한 현장을 끝내고 돌아오면, 아모스처럼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끔은 윤동주처럼 북간도의 밤을 그리며 ‘별 헤이는 밤’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지상에서 못내 사랑하던 제자들과 작별을 준비하던 예수도 예의 사랑을 당부하며, 훗날 함께했던 시간들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두고 말씀하셨다.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해 내던 긴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의 시기였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참혹한 형틀에서 온갖 고문으로 죽어 갔으며, 갓 태어난 신생공동체도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 줄 만한 어떤 지도자도, 예언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공동체를 위로하고 견디고 헤쳐 나갈 말씀이 ”묵시록“을 통해 등장했다. 요한의 묵시록은 완전히 달라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장엄하고 감격스런 필치로 전달한다. 

이렇게 도성을 묘사해 내려가던 요한의 마지막 대목이 실로 놀랍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대해 가졌던 낡은 기억을 해체하고 새로운 현실이 되게 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이 아닌가. 새 도성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이 목숨처럼 지켜 왔던 ‘성전’이 보이질 않는다. 그 자리엔 하느님과 어린양만 있을 뿐이다. 참으로 놀라운 비전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또박또박 이렇게 옮겨 적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새 예루살렘'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하느님은 기존의 세계 중심을 완전히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중심을 세웠다. 기존의 기억을 해체하고 새로운 비전이 들어서게 한 것이다. 어린아이를 지배하는 기억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듯이,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존재한다. 그의 기억이 그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인류는 새로운 기억에 의해 탄생할 것이다. 이 기억의 장으로 예수가 초대할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당신이 행한 사랑, 당신이 제자들과 써 내려간 그 사랑이다. 초대교회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중상모략과 살해 협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예수에 대한 사랑의 기억, 기억에 대한 믿음, 희망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3-26)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주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 간, 연인 간,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이 다 그렇게 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사랑받고 싶다’를 에두른 표현이고, 결핍은 ‘인정 욕구’의 다른 말이어서 내 존재를 어필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불사한다. 기꺼이 그 사람(대상)의 노예라도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알고 보면 나 좋자고 하는 것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공정치 않은 게임에 말려든 것이기도 하다. 사랑(인정)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어긋난 권력 관계 같은 것이어서 사랑을 갈구하는 자, 결핍을 느끼는 자는 필연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지키는 자가 곧 사랑하는 자“라는 전제를 내세웠다. 그의 말을 지키기 위해선 예수가 사랑의 관점을 어디로 이동시켰는지를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사랑은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조종되지 않으며, 우리가 획득하려는 인정욕구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에게서 사랑은 그 사람이 처한 맥락에서 나온다. 그가 붙들린 상황에서 ‘그’를 벗어나게 하는 것, 그를 자유롭게 하는 것, 그가 날아오르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의 관심(사랑)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러했고 돌아온 탕자를 맞는 아버지가 그러했으며, 세리와 죄인, 나병환자, 평판이 나쁜 여인들을 껴안은 예수가 그러했다. 그의 사랑엔 서열, 주종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사랑은 잃어버릴 수 있는 자유,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유, 그런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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