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교종, 5월 26일 부활 제6주일 삼종기도 가르침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6일 부활 제6주일 부활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교회가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교종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부활 제6주일 복음은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고별연설 중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요한 14,23-29 참조) 그분께서는 성령의 활동에 관해 말씀하시며 한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오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홀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원어에서 ‘파라클리토’라는 말은 도와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부께로 돌아가시지만 성령의 활동을 통해 당신 제자들을 계속해서 교육하시고 활력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선물로 약속하신 성령의 사명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당신의 지상생활 동안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기시려고 원하셨던 모든 것을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시, 다시 말해 성부께서 성자의 강생신비를 통해 인류에게 말씀하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령의 임무는 기억하게 해주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 사명을 몇 가지 요청에 의해 특징되는 명확한 삶의 스타일을 통해 실현시킵니다. 곧 주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 말씀의 준수, 부활하신 주님을 계속적으로 살아있게 하시고 현존하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따르는 온순함, 타인과의 만남과 개방된 자세를 통한 교회의 증언과 평화의 수용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안주할 수 없습니다. 세례 받은 각자는 적극적 참여를 통해 여정 중인 공동체로 행동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힘과 빛에 의해 지탱되고 활력을 받습니다. 종종 신앙의 여정을 짓누르는 우리의 시각과 전략에 의해, 우리의 목표에 의해 대변되는 세속적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주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경청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아름답고 빛나는 진정한 모습을 반영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역사의 오솔길로 인도하도록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의 선물에 마음을 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며, 매일 복음의 논리, 받아들이는 사랑의 논리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 5월에 우리가 특별한 신심으로 경배하고 기도하는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마리아께서 항상 교회와 인류전체를 보호해주시길 바랍니다. 겸손하고 용기 있는 신앙으로 성자의 육화신비를 위해 성령에게 완전히 협력하신 성모님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우리 삶을 통해 그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보호자이신 파라클리토 성령에 의해 교육받고 인도되도록 자신을 맡길 수 있도록 우리 또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프로그램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교종, 국제 카리타스회 총회 개막미사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인류는 한 가족, 우리 공동의 집’이라는 주제로 거행된 제21차 국제 카리타스회 총회 개막미사에서 교회는 자족하는 ‘완벽한 모형’이 되어서는 안 되며, ‘기업의 타협’이 아닌 복음에 매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무언가를 바꾸는 것처럼 속인다는 뜻의 ‘가토파르디스모’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론 요지.

참된 세상의 얼굴이란 매일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의 울부짖음을 듣고 불의를 겪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교회의 이름으로 구체적인 답변을 주려고 애쓰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불꽃을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신앙은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 ‘경청의 겸손’, ‘함께하는 카리스마’, ‘포기하는 용기’ 등 세 가지 핵심요소 위에 세운 ‘걸어가는 교회’를 설계합니다. 교회는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효율성의 유혹’이 없는 곳으로, ‘삶의 극심한 충격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자신의 조직에 만족하고 자신의 좋은 이름을 방어하는 능력이 있는 완벽한 모형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조직화, 계획, 모든 것을 분명히 하고 모두 분배하는 것에 너무 애쓰는 개별교회들은 불쌍합니다. 그러한 교회는 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삶의 극심한 충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가셨습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프로그램이며, 그곳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문제든 잘 준비된 처방전으로 대응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로드맵이 아닙니다. 신앙은 ‘길’, 신뢰의 영으로 언제나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특히 하느님 사랑을 선포하는 것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무게를 줄이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포기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은 집착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업의 타협’이 아니라 교회처럼 복음의 매진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 새롭게 하는 것에서 ‘가토파르디스모’(gattopardismo)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바꾸는 것처럼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시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사물의 외모를 좀 치장하지만 젊어 보이기 위해 분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미용적인 수정을 원하지 않으시고 포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심어린 대화를 원하십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근본적 쇄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통해 전해집니다. 증명하고 싶은 것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동의를 구하는 것을 비롯해 중심에 있기를 포기하고 모욕을 멈추는 경청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랑의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작은이들을 경청하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 특별히 작은 사람들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더 많은 수단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사람들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도록 각자에게 요구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경우는 오직 단 한번, 도와주고자 손을 건넬 때뿐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를 인도하는 것은 인간의 삶입니다. 교회는 컴퓨터 앞이 아니라 사람들의 현실 앞에서 식별합니다. 사상은 논의되지만 상황은 식별됩니다. 우리가 하는 위대한 것 안에 계시지 않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작은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타인 안에서 찾을 줄 아는 겸손한 시선을 통한 인간이야말로 프로그램보다 먼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함께하는 카리스마’, ‘차이를 극복하는 일치’, ‘획일성이 아니라 일치를 찾는 사랑 안에서 존재와 예수님의 교회를 인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마와 세상의 목소리는 분열을 일으키지만 착한 목자의 목소리는 양떼를 만듭니다. 그렇게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안에서 하느님의 ‘어떻게’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울러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봉헌하기 위한 길은 ‘자유롭고, 자유롭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주는 길입니다. 감실 앞에 가난한 사람들인 살아있는 많은 감실들 앞에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성체성사와 가난한 사람들은 고정된 감실이자 움직이는 감실들입니다. 그곳에서 사랑이 머물고 쪼개진 빵의 영을 모읍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떻게’를 이해합니다. 효율주의, 세속적인 것,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용기를 맹신하는 미묘한 유혹, 강박적인 조직화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길인 겸손, 일치, 포기를 받아들이는 은총을 청합시다.

 

 

“기도하기 위해 작아집시다”

교종, 수요 교리교육 ‘주님의 기도’ 마무리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을 통해 ‘주님의 기도’를 주제로 지난 몇 달 동안의 교육을 마무리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대담함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교육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교육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담함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근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 기도문이 아니라 은총으로 들어간 자녀의 친밀감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해 주신 분이시며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감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기도문을 우리에게 남겨 주시지는 않았다. 모든 소리기도의 경우가 그렇듯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성부께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교리서 2766항)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해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복음서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입술에서 피어나는 이러한 기도 표현들이 ‘주님의 기도’를 상기시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겟세마니의 밤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우리는 이미 마르코 복음 이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짧은 기도에서 ‘주님의 기도’의 흔적을 찾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괴로움을 느끼시면서도 자녀의 신뢰를 갖고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며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십니다. 복음서의 다른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정신을 기르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도는 지속적이여야 하며, 무엇보다 형제들의 기억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특히 형제들과 관계가 어려울 때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누군가에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우리는 이 표현에서도 ‘주님의 기도’와의 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의 존재도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빠!’라는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는 놀라운 요약으로 나타납니다.(로마 8,15; 갈라 4,6 참조) 루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종종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러자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고려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번째 주인공은 성령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힘없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잘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령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기도의 주인공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참된 기도를 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님 제자들인 우리 마음 안에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해 실제로 하느님 자녀들이 된 우리가 자녀답게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파신 ‘밭고랑’에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기도의 신비입니다.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성삼위 사랑의 대화에 매료됩니다. 때때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내용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표현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시편 22장 첫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을 버리실 수 있을까요? 진정 버리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과 하느님이 멀리 계심을 경험하는 시점까지 우리 죄인들을 위한 사랑을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당신이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뇌에 찬 외침 속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저의” 안에 아버지와 관계의 핵심이 있으며, 믿음과 기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 핵심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성경, 특히 시편의 모든 기도들을 취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났던 표현들을 통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우리 인류 형제자매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중단하지 맙시다. 그들 중 누구도, 특히 가난한 이들이 위로와 작은 사랑 없이 남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교육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다음의 기도를 반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기도하기 위해 우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종, 중국 가톨릭교회 위해 기도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날 일반접견에 모인 신자들과 중국 가톨릭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교종은 5월 24일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앞두고 일상의 노고와 시련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중국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친밀감을 표시했다. 교종은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께서 여러분이 언제까지나 보편교회와의 친교 안에 일치를 이루고 관용과 형제애의 증거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길 기도한다고 중국 신자들에게 전했다. 교종은 그들을 위한 기도와 축복을 약속하고 그 자리에 모인 신자들과 중국 가톨릭신자들을 위해 성모송을 바쳤다. 중국 가톨릭신자들은 상하이 서산 성모대성당에 모셔진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한다. 전 교종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2007년 5월 중국 가톨릭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5월 24일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 대축일을 ‘중국교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지정한 바 있다.

 

 

 

“여러분은 형제애를 증진시키는 사람들”

교종, 바티칸 주재 신임대사 신임장 받고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3일 바티칸 클레멘티나 홀에서 바티칸 주재 9개국 신임대사들의 신임장을 받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폭력과 무력충돌로 위협당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모든 형태의 증오보다 더 강한 형제애를 증진시키는 데 있어 서로 함께하는 책임을 촉구했다. 이날 신임장을 제출한 9개국 대사는 태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시에라리온, 기니, 기니비사우, 룩셈부르크, 모잠비크, 에티오피아다. 교종 연설 내용.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보다 ‘공평한 공존’을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공평한 공존은 단순히 정치적 전략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 나라의 정상들과 ‘높은 책임감’과 ‘시급한 필요성’, ‘분명한 의무’를 공유해야 합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계적 도전에 직면하기 위해 형제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이 단순히 사회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연대성의 한 사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상호적인 소망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또한 이 형제애는 사람, 공동체 및 국가 간 우정에 대한 보편적인 바람에서 인정될 수 있지만, 단 한 번으로 영원히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합을 이루며 공존하는데 가장 큰 위협의 하나는 폭력과 무력충돌입니다. 그러나 분열과 증오의 고통스러운 교훈조차도 “평화는 항상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에 대한 긍정적 징조들이 있습니다. 갈등해소와 화해는 분열보다 더 강한 일치와 증오보다 더 강한 형제애의 긍정적인 신호들입니다. 국제사회가 무력충돌 상황을 극복하고 평화로 가는 길을 만들고 이 소중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형제애적 대화가 필수 불가결한지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2월 4일 아부다비에서 서명한 인간의 형제애에 관한 선언에 있는 것처럼 실제로 대화와 이해와 관용의 문화는 인류 대다수를 짓누르는 경제, 사회, 정치, 환경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를 감소시키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의 평화교육

바티칸과 세계교회협의회 공동연구서 발표

 

바티칸 종교간 대화평의회(PCID)와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지난 5월 21일 제네바에서 열린 ‘평화촉진을 위한 협력회의’에서 ‘다종교 세계에서의 평화교육: 그리스도교적 관점’이라는 제목의 공동연구서를 발표하고 교회와 그리스도교 단체들로 하여금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구조적 원인에 대해 숙고할 것을 촉구했다. 연구서 서명자들은 이 연구가 “종교간 대화의 확대를 통해 교회일치적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우리의 지속적 노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고 발표했다. 이날 연구서 발표에는 바티칸 종교간 대화평의회 사무총장 미겔 앙헬 아유소 주교, WCC 사무총장 울라프 픽세 트베이트, 바티칸 제네바 유엔사무국 및 유엔전문기구 상임 옵서버 이반 유르코비츠 대주교, 아랍에미리트 상임공관 대표 엘리야 알 셰히 등이 참석했다. 이날 발표의 상당부분은 지난 2월 4일 아부다비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과 아흐메드 알 타예브 대이맘이 서명한 역사적 문서인 ‘세계평화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인간의 형제애에 관한 공동선언’에 할애됐다. 아유소 주교는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파편화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생태위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정 등이 지구의 안녕뿐 아니라 존재자체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잔혹한 테러행위,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폭력, 소셜 미디어를 통한 급진화 또는 자발적 급진화, 공개적 차별과 혐오발언, 그리고 극단주의 설교가 및 선교사, 종교기관 등이 증오와 폭력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재앙이며, 반드시 관심을 갖고 다뤄야 할 부분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아유소 주교는 갈등을 해소하고, 재발을 방지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정의를 회복하고, 만인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수호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이 교육에 있다는 공통된 확신에 기초해 연구서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이 연구서가 그리스도인에 의해, 주로 그리스도인을 위해 작성되긴 했지만 평화구축에는 모두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연구서 발표를 기점으로 다종교 세계에서 타종교 신자들과 사회, 정치활동가들이 평화교육에 관한 광범위한 소통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

‘다종교 세계의 평화교육: 그리스도교적 관점’ 연구서는 총 세 장으로 나뉜다. 첫째 장은 그리스도인이 평화교육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7가지를 제시한다. 둘째 장은 교육을 통해 평화구축을 실현할 12개 분야와 전략을 설명했다. 마지막 장은 지역교회와 그리스도교 교육기관들, 전국 및 지역적 교회일치 단체들을 위한 10가지 묵상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바티칸 종교간대화평의회 신임의장 아유소 기소 주교

 

프란치스코 교종은 신임 바티칸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에 사무총장 아유소 기소 주교를 임명했다. 6월에 67세가 되는 스페인출신 아유소 기소 주교는 지난해 선종한 장 루이 토랑 추기경의 뒤를 잇게 된다. 아유소 기소 주교는 특히 이슬람 문화에 정통한 인물로 콤보니 선교사로 수년 동안 이집트와 수단에서 지냈다. 아유소 기소 주교는 세비야 태생으로 예수성심의 콤보니 선교회 소속으로 1980년 사제품을 받고 2002년까지 이집트와 수단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982년 로마 바티칸립 아랍-이슬람대학에서 아랍 이슬람학으로 석사학위 받고 2000년 그라나다 대학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카르툼과 카이로에서 이슬람학 교수로 재직했고, 2012년까지 PISAI 학장을 맡았다. 또한 종교간 대화의 여러 모임을 주재했다. 그는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 아유소 기소 주교는 지난 2월 프란치스코 교종의 아랍에미리트 사도적 순방에 동행했다. 특히 그는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등 타종교와의 대화와 함께 가르침의 공통점을 찾아 세계평화와 여성의 권리, 자연법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도덕적 유산을 증진시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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