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14]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2박3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은 구례에 있는 태극권 사부님 차밭에 가서 차 따는 거 도와드리는 시늉을 하고, 둘째 날은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고, 마지막 날 오후 느지막이 집에 도착. 얼마나 고단했는지 아이들은 차 안에서 골아떨어졌는데 다랑이와 다나는 그대로 이튿날 아침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다랑이는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침부터 어디 가냐 물었더니 자기 밭에 심어 놓은 것들이 그동안 무사한지, 닭장에 알은 있는지 보러 간다는 거였다. 조금 뒤 연달아 들려오는 다랑이의 들뜬 목소리.

"엄마, 딸기 익은 거 찾았어!"

딸기밭의 꼬마할머니는 훌륭한 색감의 소유자, 잘 익은 딸기알의 눈부신 빨강을 보라! ⓒ정청라

"엄마, 그릇 줘. 달걀 엄청 많아!"

그 소리에 다울이 다나까지 밖으로 뛰어나가고 나도 달걀이 많다는 말에 얼른 그릇을 건네주러 나갔다. 딸기야 진작부터 퍼런 열매가 주렁거렸으니 때 되면 익을 줄 알았지만 요사이 닭이 알을 낳지 않아 왜 그럴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닭이 달걀을 숨겨 놓고 있었어. 맨날 낳던 데다 안 낳고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곳에 낳았지 뭐야? 근데 다나가 하나 깼어."

다랑이는 여전히 상기된 표정으로 그릇에 달걀을 담아 들고 나왔는데, 세어 보니 열여섯 알이나 됐다. 빛깔도 모양도 조금씩 다른 열여섯 알의 알!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나 예쁜 알이 이렇게나 많이....' 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암탉이 세 마리니 하루 두세 알씩을 받아먹고는 하는데, 그동안 숨겨 놓은 것들까지 한꺼번에 들고 나오자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뭐랄까, 느닷없이 벼락부자가 된 느낌이랄까? 아니, 달걀이니까 알부자! 알부자 되는 느낌이 이런 거였다니....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은 달걀을 받아 보다니! 얼마나 오진지 보기만 해도 좋다. ⓒ정청라

그날 이후로도 쭈욱 나는 알부자를 경험하고 있다. 딸기가 바쁘게 익어 가니 딸기알 부자, 완두콩이 여무니 완두콩알 부자, 이제 곧 오디가 익으면 오디알 부자, 버찌가 익으면 버찌알 부자, 밀보리가 익으면 밀보리알 부자가 되겠지? 우와, 나는 알부자다. 음하하!!!

하지만 만약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딸기알이 많이 달렸다면 나는 지금만큼 기쁘지 않을 것 같다. 완두콩도 달걀도 다 마찬가지다. 나와 내 가족이 먹을 만큼(가끔은 이웃과 조금이라도 나눠 먹을 수 있을 만큼)이라 나는 기쁘다. 너무 많으면 다 먹지도 못하면서 짐이 되고 일이 되고 부담이 되리라. 생명의 알은 돈과는 달라서 쌓아 두고 쟁여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가치는 오직 한때 한철일 뿐이라, 그때가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걸 알기에 더욱 그 순간 그 맛에 집중하며 오롯이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딸기를 따고, 찐 완두콩을 꼬투리째 쭉쭉 훑어먹으며, 노래 한 곡을 흥얼거려 본다. 지난해 여름 법정 스님이 손수 지으셨다는 불일암에 가서 기념품으로 챙겨 온 책갈피, 그 책갈피 속 한 구절로 만든 노래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순간순간의 있음'을 실감나게 경험하게 하는 생명의 알들이여, 그대들을 따라 나도 알찬 사람이 되리!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알부자로 사는 길!

첫물 완두콩 쪄 먹던 날, 아이들은 난리났다.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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