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해마다 유월 첫 주에는 미국 가톨릭신학회가 열리는데, 올해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피츠버그에서 열렸다. 우연히 같은 비행기에 탄 동료 교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에게는 이번 학회가 뜻밖에 좋은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인문학이 사라져 가는 이 세상에서, 미국의 지성을 주도해 온 많은 가톨릭 대학이 재정난에 허덕이며, 생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현 시점에서, 새삼 신학을 한다는 것은 무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학회의 주제는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폭력, 저항, 그리고 변화”였는데, 특히 세상의 폭력뿐 아니라 교회 안의 폭력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신학적 질문을 던져 성찰한 학회였던 것 같다. 교회의 섹스 스캔들과 미투 운동, 수도생활의 위기, 그리고 폭력에 내몰린 많은 사람들, 가난 등, 불편한 주제들을 비교적 용감하게 토론하며, “저항하는 영성”을 교회에 제시하고, 또 살아야 하는 신학자의 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가톨릭 신학은 언어 혹은 구조 자체가, 그리고 소통 방식이 남성 중심적이어서 답답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도 새로운 신학을 시도하는 소수 그룹들의 연구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사실 신학이 고수하고 있는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런 신학은 단순한 지식의 반복 혹은 재생산이 될 뿐이다. 꿈, 그리고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그 신학 안에는 마음이, 그리고 세상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가 될 뿐이다. 세상에 대한 꿈이 담긴 따스한 그리고 넉넉한 상상력으로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보며, 그 세상을 향해 걸어가자고 초대하는 그런 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톨릭 신학회가 내게 소중한 것은 일년에 한 번 만나서 교회 안에서 신학 하는 친구들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늙어 가는 것, 그 속에서 프로젝트를 계획하기도 하고, 또 학문적으로 관심하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들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친구들과 대중문화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그룹을 만들어서 연구를 시작했다. 진정한 가톨릭의 의미를 영화, 음식, 음악 같은 대중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찾아보려는 시도인데, 그를 통해, 진지하고 진솔한 동료의 마음속 깊은 갈망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한국인 신학자보다 훨씬 진지하게 지구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한”을 연구하는 캐빈, 차분하게 절대 잘난 체하지 않으며 주교회의 문서를 쓰는 프란치스칸 린 수사, 영화를 만들면서 신학을 하는 필리핀에서 온 톤 수사. 이렇게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내년의 주제와 연구방향을 정했다. 우리가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혹시나 우리가 하는 신학이 단순한 말장난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새로운 가톨릭 정신을 세상 속에서 찾아보자는 마음인데, 가톨릭 신학계에선 아직 설익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왜 이 작업이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가만히 따져 보니 그것은 마치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리고자 하는 시편 작가의 고백과 비슷한 것 같다.

'캠벨 수프', 앤디 워홀. (이미지 출처 = Flcikr)

빡빡한 일정 속에 약간의 여유가 생긴 나는 평소에 좋아하는 후배와 슬쩍 빠져나와 앤디 워홀 박물관을 찾아갔다. 상업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그의 작품을 보다가, 그가 추구한 작품들이 그가 다니던 성당에 있던 이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설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유럽의 한 가난한 가톨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무척 가난하게 살면서, 십여 년간 하루도 안 빼놓고, 미국에서 가장 싼 캠벨 수프(campbell soup)를 먹었다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웃음과 애정, 따스함이 느껴졌다. 가장 미국적인 음식,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던 그 수프를 그린 그의 그림은 어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성찬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만화 같은 즐거운 그림들을 자녀들에게 그려 주었는데, 그녀가 그린 고양이들의 그림에서, 가난해도 사랑이 넘치는 성가정의 정겨움이 묻어났다. 세상 속에서 가톨릭 정신을 찾던 나에게 앤디 워홀의 작품들은 가톨릭 정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콘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이스탄불의 조그만 경당 코라(Chora) 성당에서 만난 이콘들이 거룩함과 평화의 세계로 나를 이끌던 그 느낌과 비슷한 것이었다. 매주 성당에 다니면서 가난하게 살던 가톨릭 가정의 가난함과 단순함이 베어 있는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초기 작품에서 세상 속에서 하는 신학이 어떤 울림을 주어야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가난한 가톨릭 이민자 가정의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 줄리아 워홀의 고양이 그림. ⓒ박정은

더구나 성령 강림 대축일 아침, 학회를 마치고 동료들과 걸어 나온 거리는 온통 게이 퍼레이드(gay parade)로 축제로 술렁였다. 동성연애자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찾기 위해 투쟁했던 스톤월 저항 50주년을 맞아, 게이 퍼레이드가 더욱 성대히 진행되었는데, 내게 무척 인상적인 것은 이 퍼레이드가 단순히 동성애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다름을 축하하는 공동체의 잔치로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도 많이 보이고, 어린이들, 강아지들까지 함께 재미있게 단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던 날, 로마제국의 변방이던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름이 주는 축복과 풍성함, 그리고 그 안에서 성령의 움직임 속에 하나임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됨의 기억은 여전히 오늘도 교회를 건설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21세기를 사는 나는 성령 강림 대축일 피츠버그의 거리를 걸으면서, 각자 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또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각자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 인종과 성, 그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이 성령 강림이며, 교회의 늘 새로운 언어이며, 함께 부르는 노래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저 대면대면한 내 영혼에 갑자기 다가온 성령감림절의 설레임과 감동에 어리둥절하는 밤, 집에 돌아가는 공항 구석에 앉아 기도한다. 일상을 살면서 나와 다른 감성과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의 감성과 생각을, 마치 좋아하는 시인의 새 노래를 듣는 것 처럼 감동하면서 듣는 은혜를 내려 달라고. 누군가 건네는 서툴고 거친 말 속에 숨겨진 진심을  찾아내서 들을 수 있는 정다운 귀를 주시라고. 그리고 또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도, 굼뜨기만 한 내 마음에 다가와, 내 영혼을 만지셨음을. 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태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의 그 축복을 감히 가벼이 여기고 있었음을. 그래서 다시 고백한다.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의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있었던 게이 퍼레이드. 수십만 명이 하나되어, 다양성과 하나됨에 대한 축제를 벌였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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