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6월 16일(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잠언 8,22-31; 로마 5,1-5; 요한 16,12-15

우리는 방금, 그리스도교 대축일 가운데 하나인 성령 강림 대축일을 기념했다. 성령의 힘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한가운데에 있다. 오늘의 말씀은 이 성령의 현존의 중요성에 깊이 잠겨 보라고 초대한다.

모든 진리 안으로

요한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로부터 온다. 고별담화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인도해 주고 주님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해 주는 하느님의 숨길,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와 아버지의 사랑을 선언하신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생명이고, 이 생명은 모든 형식과 법규를 초월한다. 메시지의 요구들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 줄 터이지만, 항상 새롭고 놀랍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오는(요한 16,15)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고, 성령은 우리의 여정에 함께할 것이다. 승천 대축일이 우리에게 주님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은 그러한 사명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성령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길로 이끄므로 우리를 어떻든 두렵게 하고 의심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하기보다 안정된 틀 속에 있기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잘것없는 안전에 매달린다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묵시 21,5) 분께 어떻게 충실할 것인가? 우리의 결단, 투신을 표현하는 방식들이 창조적이지 못하다면, 어떻게 인간의 고통에 연대할 수 있겠는가? 두려움은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희망으로. (이미지 출처 = Pixabay)

사람들을 기쁨으로 삼아

이번 주일에 읽고 있는 잠언서의 구절은 매우 시적이다. 아니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창의적이다. 지혜의 시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전문가들 사이에 토론의 주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게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표현이다. 잠언의 구절은 우리를 희망으로 초대하는데, 왜냐하면 시작부터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잠언 8,23) 그리고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무상의 사랑으로부터 창조되었으므로, 뛰놀고 사람들을 기쁨으로 삼는다.(8,31) 기뻐한다는 것을 어떤 천박한 것이나 변덕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기쁨은 창조적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발명을 요구한다. 그런데 아이들의 창의력을 파괴하는 “교육”이란 것도 있다. 유명한 교육자가 자주 말하듯이: “나의 교육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중지됐고 나는 학교를.…”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과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는 용기가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일은 겸손을 요구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는 어렵고 희망이 안 보이는 처지에 살고 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희망은 실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로마 5,5) 우리는 희망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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