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교종, 11월17일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공개

 

프란치스코 교종은 오는 11월17일 주일에 지내는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를 6월13일 발표했다.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종 담화주제는 시편에서 발췌한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 9,19)다. 교종은 시편의 이 말씀이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신앙은 불의나 고통,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는다는 심오한 진리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교종은 지난 역사를 거쳐 부자와 가난한 이는 항상 존재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우리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젊은이와 어린이들을 노예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많은 결박을 인정해야 한다고 개탄했다. 또한 교종은 ‘살 곳을 찾아 고국을 떠나야 했던 가정들’ ‘부모를 잃었거나 잔인한 착취수단으로 폭력을 경험한 고아들’ ‘전문직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고 싶지만 근시안적 경제정책으로 취업이 가로막힌 젊은이들’ ‘각종 폭력의 희생자들’ ‘은밀하게 감춰진 수많은 이익으로 희생된 수백만 명 이민자’ 등을 우리가 매일 만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교종은 “우리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는 모든 배척된 이와 노숙자를 우리가 어떻게 못 본 체할 수 있습니까? 생존을 위해 혹은 옷가지를 찾길 바라며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건지려고 뒤적거리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지요!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인간 쓰레기통의 일부가 됩니다. 그들은 쓰레기처럼 취급됩니다. 이 스캔들에 연루된 이들의 일부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습니다.”라고 개탄했다. 교종은 성경에 주목하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거듭된 관심을 보이셨는지를 강조했다. “우리는 성경이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외치는 절박한 호소를 결코 비껴갈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상황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고통받으시는 주님의 몸에게서 우리를 분리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살을 만지고 복음화의 참된 형태인 섬김을 통해 헌신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증진을 포함해 가난한 이들의 증진에 헌신하는 것은 복음 선포와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현실과 역사적 타당성을 드러냅니다.”라고 말했다.

교종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두 사람을 언급했다. 먼저 이탈리아 출신 프리모 마촐라리 신부의 말을 소개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불의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화약통입니다. 불이 붙으면 세상은 폭발할 것입니다.” 이어 최근 선종한 ‘라르슈’ 설립자 장 바니에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열정을 갖고 수많은 젊은이를 비롯한 남자와 여자, 힘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미소 짓기 위해 매일 일했던 사람들을 주변으로 불러 모아 소외와 고독에서 벗어나는 참된 구원의 ‘방주(ark)’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가장 작은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우선순위”며 그래야 교회의 신뢰를 침해하지 않고 힘없는 우리의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소비주의 문화’와 피상적이고 덧없는 웰빙의 확산에만 관심을 두는 ‘쓰고 버리는 문화’의 맥락에서 희망의 증인이 되기란 쉽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본질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실질적인 것을 주며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데 힘쓰기 위해서는 사고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종은 비록 가난한 이가 옷이나 따뜻한 음식 등을 필요로 하지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이며 하느님 백성인 순례자의 마음에는 가난한 이를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아무도 배척하지 않으며 참된 회심의 순례여정에서 모두를 포함하는 구원의 힘이 약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다고 말했다. 교종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라며 끝으로 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정한 복음선포자가 되길 원한다면 구체적인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더욱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협력하게 보장할 수 있도록, 그래서 아무도 연대와 친밀에서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비롯해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해야 한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이같이 청했다.

 

 

“하느님께 다가서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교종, 이탈리아 지진피해지역 카메리노 방문 주일미사

 

프란치스코 교종은 6월16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3년 전 지진피해 지역인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주 카메리노시를 방문해 복구에 힘쓰는 주민들을 격려하고 주교좌성당 인근 카부르 광장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했다. 교종은 주민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삶의 무게는 우리의 어깨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도하며, 다시 건설할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께 기도하는 한편, 다른 이들이 시작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음의 위로자요 선의 건설자가 되라고 초대했다. 교종은 이날 미사에서 카메리노 지진 피해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까이 계시다’는 주제로 강론했다. 교구장 프란치스코 마싸라 대주교는 환영 인사말을 통해 지난 2016년 지진으로 도시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주민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은 고통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뜻을 품었다고 말했다. 교종은 괴롭고 상처를 입은 그들에게 괴로움과 슬픔을 몰아내는 희망과 주님의 가까이 계심,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의 큰 선물이자 위로자요 해방자인 성령에 대해 설명했다. 강론 내용.

우리는 작고 무력하지만 하느님께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전례 화답송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시편 말씀입니다. 만일 일어서는 것이 좌절되고 희망이 먼지로 끝난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해, 우리의 안과 밖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확신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우리에게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그분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많은 일들은 빨리 잊혀지는 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 눈에는 아무도 경멸할만한 자가 없으며 각자는 그분에게 무한한 가치를 지닌 사람입니다. 땅이 흔들렸을 때 우리는 하늘아래 작고 무력한 존재였지만 하느님에게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성령은 우리 상처에 희망으로 기름 부으십니다. 대체할 수 없고 유일한 자녀들임을 기억하는 것은 마치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최악의 상황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가 슬픔에 빠지지 않고 굴복하지 않도록 힘을 줍니다. 부정적 기억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감옥에 갇혀 있는 것’들이라고 여길 때도 닥쳐옵니다. 거기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선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위로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필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삶의 무게 아래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노예의 기억‘을 ’자유의 기억‘으로 변화시켜주시고 과거의 상처를 구원의 기억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을 위해 행하셨던 것을 우리 안에 완성시켜주십니다. 곧 그분의 상처들, 악에 의해 깊게 파인 흉한 상처들이 성령의 힘을 통해 자비의 운하가 되었고 부활하게 만드는 다시 일어서는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비추는 빛나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우리의 상처로 초대할 때 성령께서 이런 일을 행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희망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희망의 향유로 나쁜 기억들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성령의 키워드는 희망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괴롭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 슬픔 주변에 ‘둥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젠가는 나빠지는 지상의 것으로 만들어진 희망처럼 일시적인 희망 혹은 덧없는 희망이 아닌 ‘살아있는’ 희망, 그런 희망으로 우리를 키우시며, 우리가 태어난 목적인 경이로운 운명을 열어젖히시어 우리를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성령의 희망은 길게 간직하는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충실함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기간의 종료가 없습니다. 성령의 희망은 낙천주의가 아닙니다. 아주 깊은 곳에서 탄생되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불붙습니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불어넣습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내면에 평화와 기쁨을 남기는 희망입니다. 그 어떤 삶의 폭풍우도 뿌리 뽑을 수 없는 강한 뿌리를 가진 희망입니다. 삼위일체는 퍼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빛나는 신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우리 가까이에 모시고 친근하게 해주시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오소서, 위로자 성령이여, 저희에게 빛을 주시고, 이러한 비극에 대한 의미를 주시며, 낙심하지 않는 희망을 주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은 ‘퍼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빛나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신 성부이시며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며, 삶의 무게를 짊어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십자성호 그을 때마다 이름을 부르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시며, 우리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해주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부활시키시고, 해결하시며, 다시 건설하는 전문가이십니다. 보수할 뿐 아니라 건설하기 위해 다시 시작하고, 시작하기 위해 화해할 뿐 아니라 일치하기 위해서 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고통을 겪기도 하겠지만, 다시 시작합시다. 거의 3년이 지났습니다만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이 지역을 보는 사람의 절망이 커지는 것, 그리고 처음에는 언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우리의 심금을 울렸지만 점차 관심이 줄어들고 약속이 잊혀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기억하고, 보수하며, 다시 건설하고, 다 함께 이를 행하도록 부추기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 ‘선의 건설자, 마음의 위로자’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 당신이 항상 기억하시는 인간은 당신의 큰 꿈입니다. 저희는 ‘모든 위로의 샘이신 하느님’의 자녀들이므로, 저희도 세상에서 희망과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존재임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저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 저희의 상처 입은 기억을 희망으로 기름 부어주시며 치유해주시는 하느님, 내면으로부터 저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저희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희를 선의 건설자가 되도록 마음의 위로자가 되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다른 사람들이 시작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각자 약간의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각자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가가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를 수호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종, 해외주재 바티칸 대사들에 지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6월13일 바티칸 클레멘티나 홀에서 해외 주재 바티칸 대사들과 만나 사전에 준비한 열정적이고 긴 연설문을 전달했다. 이 연설문에는 바티칸대사 임무수행을 위한 권고의 ‘십계명’이 담겼다. 연설문은 바티칸대사들의 임무수행을 위한 나침반이었다. 6월15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리는 바티칸대표 회의에는 103명이 참가했다. 98명은 대사이며 5명은 상임 옵서버다. 교종은 2013년과 2016년 각각 개최된 것처럼 3년마다 열리는 이 회의를 강화하길 원했다. 교종은 연설문에서 바티칸대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대사는 교회와 교종을 대표하기 때문에 교종을 비난하는 것과는 상응할 수 없는 사명을 가졌으며, 교종과 교회에 적대적인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그런 단체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바티칸 대사는 교회를 중상모략에 빠뜨리려는 악의 세력에서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세속적인 가치에 속지 말아야 하며 뇌물의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목적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대사들이 대사관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사람들과 만나면서 화해의 사람이 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대사들의 사명을 밝히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에서 오는 빛이 필요하다면서 기도 없이 행하는 소명은 항상 불만과 좌절을 느끼는 단순한 공무원이 되게 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교종은 이 모든 권고는 부활하신 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면서 기쁜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기지시적 태도를 극복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오”

프란치스코 교종 6월12일 수요일반 접견 교리교육

 

교종은 6월1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을 통해 공동체 차원의 식별을 강조했다. 교종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DNA 안에는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질에 얽매이지 않으며 하느님의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일치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리교육은 사도행전 두 번째 교육으로 마티아가 유다 후임으로 사도가 된 과정을 기록한 사도행전 1장을 주제로 했다. 교종은 교리교육을 마치면서 존 통 추기경과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과 함께 바티칸을 방문한 홍콩의 다종교 대표단에게 인사했다. 교육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여행을 따르는 교리교육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여행은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의 여행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복음의 여행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처럼 더 멀리, 더 멀리, 더 멀리 갔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부활은 다른 여러 사건들 중 하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원천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예수님 명령에 순명하며, 친교를 이루어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중심으로 수동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친교를 강화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준비합니다. 그 첫 번째 공동체는 120여 명의 형제자매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라는 숫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하신 열두 사도들 때문에 교회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난의 고통스러운 사건 이후 주님의 사도들은 더 이상 열둘이 아니라 열한 명이 되었습니다.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유다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다는 이미 주님과 타인과의 친교에서 벗어났고 혼자 일했으며 자신을 고립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이용하면서까지 돈에 집착했습니다. ‘친구’(마태 26,50)에서 적으로 변하고,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사도 1,16)로 변하면서 교만의 바이러스가 정신과 마음을 감염시키게 하면서까지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지평을 상실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최측근 그룹에 속하고 예수님 직무에 참여하는 큰 은총을 받고 어느 순간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루카 9,24 참조) 그는 온 마음으로 예수님께 속해 있었던 것을 중단하고 그분과 그분 제자들과의 친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그만두고 스승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는 스승을 팔아 넘겼고, ‘부정한 삯’으로 밭을 샀지만, 그 땅은 소출을 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피로 물들었습니다.(사도 1,18-19참조) 유다가 삶보다는 죽음을 선호했고(신명 30,19; 집회 15,17참조) 암흑과 폐허와 같은 악인들의 길을 따랐다면(잠언 4,1; 시편 1,6참조) 그와 반대로 열한 제자는 생명과 축복을 선택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서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세세 대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데 기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의 배신으로 상처 입은 공동체 앞에서 유다의 직무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야 할 필요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누가 유다의 직무를 대신할 수 있는가? 베드로가 조건을 제시합니다. 새로 사도단에 들어올 사람은 예수님께서 요르단에서 세례 받으신 때부터 시작해 마지막, 곧 예수님 승천까지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사도 1,21-22) 열두 사도 그룹은 다시 구성되어야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공동체 차원의 식별이 시작됩니다. 공동체 차원의 식별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곧 일치와 식별의  관점으로 현실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보자는 요셉 바르사빠스와 마티아 두 명이었습니다. 공동체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내버린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주님께서는 제비뽑기로 마티아를 뽑으시고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두 사도의 그룹이 재구성되었습니다. 열두 사도의 그룹은 사도들이 제공하는 첫 번째 증언인 친교의 표징이자 분열과 고립, 그리고 사적인 공간을 절대화하는 생각을 이기는 친교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열두 사도들은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방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대한 믿을 만한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일치의 은총을 통해 당신 백성들 가운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계신 분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주 예수님이십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아래 살기로 선택합니다. 형제들과의 일치 안에서 말이죠. 형제들과의 일치가 자아의 진정한 선물이 가능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우리 또한 자기지시적 태도들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은총을 가두지 않고 열등감에 빠지지 않으면서 부활하신 분을 증언하는 아름다움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사도단이 재편성된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DNA 안에서,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질과 은총에 얽매이지 않으며 증인들이 되게 하는 다시 말해 살아계시고 역사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빛나는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일치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대화를“

바티칸 가톨릭 교육성, 젠더에 관한 문헌 발표

 

바티칸 가톨릭교육성은 “남성과 여성, 그분께서 이들을 창조하셨다. - 교육분야의 젠더 이론 문제에 관한 대화의 길”이라는 제목의 문헌을 발표했다. 이 문헌은 청소년 교육 종사자들로 하여금 현대사회 논쟁의 중심에 있는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의 폭넓은 지평에 근거해 “체계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문헌은 특별 가톨릭계 교육기관을 비롯해 그리스도교적 비전으로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 학부모, 학생, 교사, 주교, 사제, 수도자, 그리고 신앙인들로 구성된 교회운동 및 연합체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바티칸 가톨릭교육성은 보통 ‘젠더 이론’이라 일컫는 이데올로기가 다양한 모습으로 도전해오고 있다면서 특별히 감응성 및 섹슈얼리티 부문의 교육적 위기상황을 언급했다. 이어 젠더 이데올로기가 남성과 여성의 본성적 차이와 상호성을 부정하고 이를 한낱 역사적 산물이나 문화적 조건으로만 간주한다면서, 이 같은 사고방식에 따르면 성 정체성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이 된다고 지적했다. 문헌은 또 현대사회의 문화적 환경으로 특징되는 인류학적 혼란이 가정의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헌은 이어 교종 권고 ‘사랑의 기쁨’을 인용, 이러한 젠더 이데올로기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정체성과 정서적 친밀감을 지지하는 교육 프로그램 및 법률 제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이상이 ‘경청(listening), 사유(reasoning), 제안(proposing)’의 세 가지 기본 원칙에 기반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가톨릭교육성 새 지침서의 기본 맥락이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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