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14일(연중 제15주일) 신명 30,10-14; 콜로 1,15-20;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 (1651-56)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어떤 정수로 이끈다. 즉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정수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이번 주일의 말씀들은 신명기의 확신에 찬 말들로 시작된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신명 30,11) 하느님께서는 어떤 초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지막 판결에서, 하느님은 오직 매우 인간적인 어떤 것을 묻는다, 말하자면 사랑에 관해서다: 첫 번째,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신명 6,5) 즉시 이어서 “너의 이웃을 너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율법과 모든 계명들은 이 특별하고 포용적인 사랑에 담겨 있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율법교사는 이미 이것을 다 알고 있다. 문제는 그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구체적으로 질문할 때 나타난다. 만일 이웃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그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인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한 비교로 대답한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이웃은 혈육, 우정, 혹은 비슷한 이념의 가까움이라는 기존의 조건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를 이웃이 되게 하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관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대함이 우리를 그들에게 가까이 가게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이, 이번에는 적절하게 던져진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는 대답해야 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6-37)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설명한 초점은 사랑하는 능력을 가깝거나 알려졌다는 한계에 제한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애덕은 집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복음에 따르면, 애덕은 고통받고 있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에 있건 어디 있건 간에, 시작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비유는 다른 몇 가지 점들도 분명히 전한다. 무엇보다 먼저, 이웃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 학대받고 상처 입은 것을 보고 영향을 받는 순수하게 인간적 사랑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먼저 이성적이고 효과적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직접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그를 돌보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지불한다. 효과성은 분명히 이웃을 진실하게 복음적으로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무엇인가 행동함으로써 응답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필요한 것(개인적, 사회, 물질, 애정 등등)에 관해 신중한 분석을 해야 한다. 필요란 거기에 적절하게 응답하고 해결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똑같은 정도로,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데, 실천으로 성취된다. 율법교사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은 단언으로 마무리한다: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사랑은 적극적 연대로 증명되고, 따라서 이론의 어려움도 구체적으로 풀린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도 나가서 우리 이웃의 가는 길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웃 사랑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잣대로 삼는 것, 다시 말하자면 다른 이들의 고통과 필요에 움직여서 어떤 건설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힘(신명 30,11)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매우 요구적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의 징표가 된다. 그리스도께 일치하고 “머리”, “시작” 그리고 “맏이”이신(콜로 1,18) 분의 은총으로 새로운 역사의 역동적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 움직임은 모든 것들의 선을 추구하는 사랑 - 연대에 근거한 사회생활과 개인 관계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 현상은 가장 약하고 가장 무시된 사람들의 필요를 가장 우선적으로 정의롭게 해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평화를 성취하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도전은 이웃 사랑을 역사적, 해방적 변화에 효과적인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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