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1]

오늘부터 격주 수요일마다 [큘라, 엄니와 화해하다]가 10회 연재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있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이 산을 오르다 보면 때로는 꽃향기가 가득한 오솔길을, 때로는 돌투성이의 비탈길을 만난다. 하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더라도 가던 길을 멈출 수 없다. 애증이 교차하는 그 긴 과정을 거치면서 나 자신과, 부모와 화해하는 것을 배운다."

이 연재를 통해 중년기에 겪었던 험난한 화해의 과정을, 재정립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야기해 주실 최금자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엄니는 89살로, 슬하에 3남2녀를 두셨고 난(큘라-조카손자가 나에게 지어준 별명으로 드라큘라의 줄인 말) 다섯째 중 막내딸이다. 올해 2월 23일, 엄니는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셨다. 7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얼마나 허전하시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니네요.” 하신다. 엄니는 남편 잘못 만나 평생 고생하다가 늙을 말년에는 병든 육신만 남아 힘들다며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종종 회상하신다. 남편 복은 하나도 없어도 자식 복은 있어서 다행이라며 홀로 남은 인생을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엄니는 평소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조금 걷기라도 하면 숨을 몰아쉬신다. 나는 5월 초 엄니 집에 2박3일 머물렀다. 하루는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시다가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같이 몰아쉬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셨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에 엄니는 폐에 물이 차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아들들이 번갈아 가면서 엄니의 병실을 지켰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콧구멍으로 계속 나온다 해서 휴지로 콧구멍을 막으라고 하자 바로 실행에 옮기신 울 엄니. ⓒ최금자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고집이 더 질겨진다. 울 엄니는 둘째가라며 서러워할 똥고집의 소유자시다. 병원을 떠올리면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 한 번은 엄니가 엄청 아프다고 해서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했다. 문제는 진료 당일 아침에 그 유명한 똥고집이 발동한 것이다. 그새 몸서리쳐지던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죽어도 병원에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수시로 벌어지는 엄니의 변덕이었지만 그날은 내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혔다. 화산의 용암처럼 내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엄니를 병원 모시고 간다고 새벽부터 서둘러 전철로 2시간 걸려 왔는데. “엄마는 언제나 자신만 생각하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매번 막판에 뒤집고. 이 집에 다시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다시는 이 집에 안 와.”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나는 가방을 걸머지고 집을 뛰쳐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와 언니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금자야, 이러면 안 된다.”라며 아버지가 나를 말리셨다. “아버지, 내가 계속 엄마와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그래서 가는 거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날 엄니의 병원 진료는 불발탄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뒤 며칠 동안 나는 엄니에게 매일 하던 전화를 걸렀다.

이번 엄니의 입원은 그때와 달리 순조롭게 이뤄졌다. 엄니는 목요일에 입원하셨고, 나는 금요일에 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본죽리(이천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니를 문병하러 갔다. 그날 병실 당번인 막내 오빠는 간병인이 아니라 경비원처럼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한 나는 오빠에게 내가 있을 테니 집에 가라고 했다. 얼떨결에 예상치도 않았던 1박2일 엄니 병간호를 했다.

다층 주택에 사는 언니는 아래층에 사는 엄니를 돌보고 있다. 4세대가 한 건물에 모여 살도록 배려한 언니는 부모님 돌보랴 손자 손녀 키우랴 하루하루가 힘겹다. 피곤함에 찌든 언니가 안쓰러워 간병인 침대에 잠시라도 누워 있으라 했다. ⓒ최금자

오빠가 병실을 떠나기 전에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마트에 가서 엄니가 좋아하는 딸기와 토마토 그리고 양념치킨을 사서 양손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식욕을 돋아 주기 위해 토마토를 먹겠느냐고 물어도 싫다고 하고. 마침 조카들이 병문안을 와서 딸기를 씻어서 할머니에게 드렸으나 입맛 없다며 이마저도 사양했다. 마음 같아서는 볼기를 때려서라도 먹게 하고 싶었다. 평상시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면역력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병이 생겨 입원해서 자식들을 힘들게 하는 엄니를 보면 정말 얄밉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안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려 병이 나고 그로 인해 자식들을 불러들이는 엄니의 이중적 행동을 마주하면 참으로 이기적이라 여겨진다.

내가 어릴 때 막내의 특권인 어리광을 냉정하게 뿌리치셨던 엄니가 노인이 되더니 오히려 나에게 어리광을 부리신다. 자주 엄니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데, 때로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소연하신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걱정이 되어 엄니와 위 아래층에 사는 언니에게 전화 걸어 엄니 상태를 물어보면, “방금 전에 엄마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던데.”라고 할 때 어이가 없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또 다른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처음에는 그런 엄니의 행동에 적응이 안 되었는데 이제는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대동맥 파열로 입원한 나를 문병 온 부천지구 교사들-2005년 이탈리아로 안식년을 떠나기 전, 10주에 걸쳐 내가 실시한 ‘주일학교 교리교사 양성과정’에 참여한-과 병자치유와 각자를 위한 자유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 ⓒ최금자

나와 엄니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참으로 희한한 사실이 있다. 그리도 냉정하고 무뚝뚝한 엄니가 내가 힘들고 위험한 순간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2년 전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고 멘붕인 상태로 집에 돌아온 나를 맞이한 사람이 바로 엄니였다. 나를 보자마자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라며 서럽게 울던 엄니. 울고 싶은 사람은 나였는데 말이다. 한 달 전에 등쪽을 지나가는 대동맥이 터져 119 구급차에 실려 갔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우리 집에 잠시 지내러 오신 엄니였다. 자신이 딸네 집에 왔을 때마다 큰일이 벌어지니 참으로 암담하셨을 것이다. 대동맥 파열 사건으로 19일간 병원에 입원한 난, 그중 5일간 중환자실에서, 나머지는 일반병실에서 보내고 퇴원했고, 지금도 조심스럽게 몸조리를 하고 있다.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