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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회의, 유사 종교, 그리고 안 사요

기사승인 2019.07.24  16: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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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최근 한국 뉴스에서 한국 대통령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은 옆 나라 총리의 얼굴. 그리고 다른 나라의 내각 구성을 위한 참의원 선거의 결과가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상황이란. 이것 자체가 자주 독립 국가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인가 반사적으로 불쾌해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며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파는 이가 힘 과시를 위해 들고 나온 국가 규모 ‘안 판다’의 억지 주장에 맞서 개개인의 자리에서 조용히 시작된 ‘안 사요’ 운동. 거짓과 폄하를 바탕으로 감정적 ‘혐오’의 반응을 부추기는 ‘혐한’ 도발에 법과 정의의 집행을 촉구하며 차분히 맞서는 ‘반일’, ‘반아베’. 일본이 자국의 배타적 이익을 위한 침략과 그 사실의 왜곡과 합리화에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만큼 그에 반한 저항과 투쟁의 시간, 그러나 타협과 눈가림의 시간도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는 생각, 오히려 ‘바로 그’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산재와 소비재로 긴밀하게 연결된 부위를 건드린 탓에 오히려 오랜 숙제였던 기술과 생산력 독립을 촉구하고 실현할 기회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부위를 들여다볼수록 그 근원에는 바로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자주권’의 근본적 박탈의 역사, 이것을 조장하고 연장한 이들의 연결 마디가 드러나 보입니다. ‘안 사요’는 단지 당신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줌으로써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겠다는 의지 표현에 한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식민지배 이후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한 정신, 대체 얼마만큼 기대고 있었는가를 알아차리고 인정하기도 아찔한 종속된 정신이 진정한 자주 독립으로 가기 위해 단절하고 새로 시작하는 초입으로 보입니다. ‘안 봐요’, ‘안 뽑아요’는 그 해방을 지연하는 데 전력을 다함으로써 대대손손 대한민국의 부를 챙겨 온 이들에게, 그리고 (그런 줄 알거나 알지 못하고) 협조해 온 이들에게 그만, 이라고 멈춰 세우는 것입니다. (소위) 언론, (소위) 지식인들의 자발적 굴종의 독려와 이를 위한 거짓의 생산과 유포를 이제 부끄러워하고 멈추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긴 시간 이 상태의 유지를 가능하게 한 것인가요. 우리 각자가 (그런 줄 알거나 알지 못하고) 이 유지에 기여한 바는 무엇일까요.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의 공통된 바탕은 아마 ‘교육’일 것입니다. 우리 교육의 내용과 방식, 이를 통해 형성된 사고방식과 내용은 그렇게 사회를 구성해 온 토대가 되었습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일본 식민지 시대 한국 교육의 한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한국 근대 교육사를 뒤져 보다가 발견한 당시의 신문 기사입니다. 일본 식민 지배 정책에 따라 조선인 대다수가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수준과 기간은 일본 ‘본토’의 교육 수준과 기간에 비해 현저히 낮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기사는, 이런 중 일본이 극소수의 조선인에게만 한 단계 더 높은 고등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서 ‘국가 봉사직’을 주는 조건을 걸어 소위 ‘입시 경쟁’이 일어났고 이에 탈락한 이들 중 하나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시도했다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출세를 위해 경쟁하는 데에 혈안이 된 본성을 가졌고 (고등교육과정 입시제는) 이를 이용한 것’이라는 평을 덧붙입니다. 뭔가 익숙한 구도입니다. 교육이 생각하는 능력의 신장을 통해 자주적 개인과 공동체원으로 성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출세의 도구와 무기로 쓰이는 현실은 이런 과정을 포함해 생산된 결과라고 하면 너무 무리일까요. 교육은 원래 이런 것처럼, 그래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처럼, 나아가 교육을 ‘신분 이동의 사다리’라며 민망하게도 교육 개혁안에 명기해 전제로 두고 ‘사다리를 사용할 기회를 평준화 하자’며 개선안을 찾아보자는 교육 당국의 시각은, 원래 그런 걸까요. 이렇게 바라보고, 내면화하고, 살아온 것은 누구의 눈인 걸까요.

굴종하는 이를 양산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 반복적으로, 체계적으로 양산된 굴종하는 정신은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힘을 가진 자가 주입하는 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물론 성찰은 불가능하고 자신에 대한 생각마저도 그가 일러주는 대로, 그 이미지로 가질 뿐입니다. 피지배가 가능한 자가 됩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동안 정신력을 말살하고 경제적 수탈의 도구로 삼기 위해 매우 공을 들인 것이 바로 이 교육의 방식과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배와 피지배의 정신성 양산의 상호 관계는 1945년 해방으로 끝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 가치가 무엇인가를 깊이 보는 것은 겉모습과 현상 너머의 너머를 좀 더 들여다보는 집중을 요합니다.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돌아가기 위한 개헌을 기치로 삼은 아베의 정치 사상과 행보의 기반에 있는 조직 ‘일본회의’는 몇 년 전 출간된 책과 소수의 언론을 통해 한국에도 잠시 알려졌다가 이번 사태를 기회로 점차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해 온 주장을 살펴보면 아베 내각의 이해할 수 없는 기조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정신과 사상을 구성하는 근본에는 ‘천황이 세계를 지배해야 하고 일본인은 신에게 선택된 민족으로서 우월하여 다른 민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침략과 지배를 당연시하는 유사종교 ‘생장의 집’, 그리고 전쟁 전 ‘천황’과 한 몸이었고 전국의 신사를 중심으로 그 부활을 꿈꾸는 ‘신도’라는 국가·민족 종교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 찾아보는 과정에서 ‘생장의 집’은 심지어 그 교주가 발간한 방대한 시리즈의 책을 한국의 출판사에서 착실히 번역해 왔으며 ‘신앙 간증’을 하는 이들이 있고 현 교주의 새해 인사와 교리도 한국어로 잘 번역되어 유튜브로 업데이트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유사종교의 특징을 착실히 갖추어 혹세무민의 전형적 예시로 꼽을 수 있을 이들이 뒷받침하는 ‘일본회의’에 대다수의 의원이 속한 일본 내각 여당과 아베 총리의 헌법 개헌을 위한 몸부림은 그래서 오히려 대한민국을 여전히 점령지, 속국의 상태로 두고자 하는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합니다.

국내 ‘안 봐요’, ‘안 뽑아요’의 주인공들은 왜 저 목소리를 대변해 주며 거짓의 양산도 불사할까요. 이는 단순히 ‘우리 편, 너희 편’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한 사람의 주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반성하고, 새롭게 행동할 수 있는 내적 체계의 부재.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교육을 통해 ‘생산’되고, 이런 사람에게 참과 거짓의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생각할 수 없음은 무엇이 참이고 왜곡이며 거짓인가를 구별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나를 잘 (먹고) 살게 해 줄 것이라 믿는 힘 있는 자’가 말하는 것이 참이 되므로 그에 따라 분노하고 기뻐하고 움직이는 동력도 생성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아베 총리의 ‘학원 비리’ 스캔들의 실상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정치 인생 최대 스캔들로 드러났으나 한반도 전쟁 위기설과 북한 도발설 등으로 무마된 이 비리는 단지 사설 학교 건립 부지 매입에 국고를 불법 지출하고 서류를 위조한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 아베를 정신적 중심 인물로 두고 군국주의 사상교육을 유아, 초등교육부터 시행하던 실체가 드러났다가 덮여 버린 사건이었습니다. 교육은 침략하기 위해서도, 침략을 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으로 침략당하는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교육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예와 원리는 의외의 자리에서 발견됩니다. 그 교세를 상당히 확장한 대표적 유사종교 ‘신천지’와 관련한 현상입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그 교리의 어이없는 짜맞춤과 왜곡, ‘모략’이라 자칭하는 ‘거짓말’ 일색의 선교 방식과 가족도 버리게 하는 폐쇄성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는데도 왜 그 많은 이들이, 특히 그 많은 젊은이가 속절없이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요. 종교, 사회적 측면에서 여러 분석과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제 자신이 가장 크게 책임을 통감한 지점 중 하나는 이 교리가 작동하는 원리, 한국 학교 교육의 전형적 교육 원리였습니다. 신천지 교리의 기본 방식은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을 ‘짝 맞춰’ 외우게 하는 것입니다. ‘A는 B’라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외우게 하며 심지어 잘 외우게 하면서 경쟁도 시킵니다. 이해하려 스스로 애쓰지 않아도 답을 딱딱 이야기 해주고, 그것을 잘 외우면 엄청난 칭찬과 지지를 해주고, 이 방식이 점점 더 강화되면 갈수록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 자신들의 교주가 구세주임을 이야기하는 지점까지 갔을 때 어떤 오류도 발견할 수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상태가 됩니다. 한국의 학교 교육 원리의 근간인 행동주의 주입식 교육의 원리입니다. 지배와 종속을 가능하게 하는, 자주적 인간으로의 성장을 그 싹부터 자라지 못하게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 방법입니다.

‘옳은 것’을 찾고자 해도,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잘 먹고 살게’ 해 줄 것이라 장담하는 이들, 분열을 일으켜서라도 배타적 소속감과 만족감을 제공하는 이들의 주장이 유일한 ‘진짜’가 됩니다.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불가능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국민의 정신성을 이렇게 유지시키는 방법의 역사는 그래서, 교육을 통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리겠지만, 자신들만의 이익을 유지하고 챙기기 위해서라면 거짓을 계속 양산해 내고 이용하는 이들, ‘안 봐요’와 ‘안 뽑아요’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주체들이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그만큼 존립이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한국의 이 과정은 새 시대의 국가간 호혜적 관계 안에서 일본 국민들 역시 자국 내에서 진정한 ‘안 봐요’, ‘안 뽑아요’ 과정을 감으로써 민주 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여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바라 봅니다. 그렇게 국가 차원의 진정한 과거 반성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자주 국가간 관계와 그로 인한 동아시아 및 세계 구도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해 보는 것은 너무 멀리 보는 것일까요.

‘라친스키 공립학교 수업의 암산’,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 (1895) (이미지 출처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홈페이지)

오늘은 글의 말미에 그림을 소개합니다. 러시아의 중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작품들 중 크게 발견되는 주제가 ‘농촌 학교의 풍경’입니다. 여기에서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 배경과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실상까지 이야기하기엔 너무 깁니다만, 그가 이 주제로 그린 작품들 속 발견되는 공통점은 우리의 이 이야기에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배우고 싶지만 학교에 가기 어려운 이들, 그런 중에 힘들게 얻은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진지함, 생각하는 아이들의 빛나는 눈빛, 상상하고 생각하며 몰두하는 아이들의 표정 등입니다. 그중 하나인 이 그림은 구체적으로 학교 교실의 수업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칠판에 선생님이 적어 놓으신 어마어마한 ‘암산’ 문제 앞에서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이 각양각색입니다. 그중에서 화면을 향하여 얼굴을 보이고 있는 전면의 두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암산이라 함은 저 문제를 자신의 머리 안에서, 오직 자신의 힘으로 붙들고 생각하고 검토해야 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답만 찾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답으로 가는 방법을 찾고, 그 길을 홀로 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고심하는 눈빛은 힘이 있고, 발견한 눈빛은 탄성 속에서 빛납니다. 여전히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순간이겠습니다만, 아이들의 생각의 힘은 교실을 넘어 이 그림 밖으로 뻗어 나옵니다. 두 아이의 발이 눈에 들어옵니다. 생각은 스스로 걸어 나가게 하고 그곳이 어디든 내적 자유를 지닌 자유인으로서 살게 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이들로 성장하여 구성하는 국가는 자유인들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민주국가는 누군가 만들어 국민으로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들이 스스로, 더불어 만들어 가며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눈앞의 크고 작은 이익을 포기하며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안 사요’가 한국과 이웃 나라들의 국민들이 각자, 그리고 함께, 자유인들의 진정한 독립 국가를 만들어 가는 한 시작의 선언이 되기를, 그 해방을 향한 열망이 진정한 교육의 본질을 찾고 변화하기 위해 몸부림치게 하기를, 그 길을 다 갈 때까지 쉽게 포기하지도, 타협하지도, 지치지도 말기를. 그림 왼편 교실 벽의 성화 속 성모님과 그 품에 안기신 아기 예수님과 함께 기도 드립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하영유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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