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고통받는 이를 일으켜 세우는 가난한 교회가 되시오”

교종, 8월7일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8월7일 지난 7월 휴식기간 중 중단했던 수요 일반접견을 재개하면서 사도행전에 대한 교리교육을 계속했다. 교종은 이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름발이를 치유한 베드로의 기적사화를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돕는 우리들의 손도 ‘예수님의 손’이라고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말에만 의존하지 않고 선포의 진실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행동에 의존합니다. 이는 사도들의 행함으로 일어나는 ‘이적과 표징’(사도 2,43)으로 자신들의 말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전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을 통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마르 16,20) 사도들이 행한 수많은 표징과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치유사화에서 기적을 대면합니다. 이 사화는 선교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이스라엘 신앙체험의 중심인 성전으로 갑니다. 성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루카는 그 시간을 명시합니다. 구시, 곧 오후 3시입니다. 이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희생제물을 바치는 시간입니다. 희생제물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표징입니다. 아울러 그 시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 한 번”(히브 9,12; 10,10) 바치며 죽으신 시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성전 문 곁에서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던 걸인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왜 문 곁에 있었습니까? 모세의 율법(레위 21,18 참조)은 왜 죄의 결과로 간주된 신체적 장애인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했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를 두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을 기억합시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장애의 근원에는 항상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 당했습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버려진 많은 사람들의 패러다임인 절름발이는 성전 문 곁에서 매일 했던 것처럼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 도착하자 눈빛 전쟁이 시작됩니다. 절름발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합니다. 반면 사도들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다른 선물을 받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보라고 권합니다. 절름발이는 그들을 쳐다보았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사도들은 관계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대화하고 감사하고 마음의 영감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좋아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랑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만남을 통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성전은 종교의 중심지이자 경제적, 재정적 교류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예언자들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질책하셨습니다.(루카 19,45-46 참조) 저는 이에 대해 성사들보다 돈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당들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가난한 교회가 되십시오! 가난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그 걸인은 사도들을 만나 돈은 받지는 못했지만 인간을 구원하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자세로, 곧, 베드로는 서 있는 자세로 이 환자를 만지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불구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행위에서 ‘부활의 모습’(사도행전에 대한 강론)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장벽 대신 우정과 연대의 가교를 만들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인류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 말입니다. 손을 잡을 줄 알고 단죄하지 않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동행하는 ‘모든 이의 어머니로 여기는 국경 없는 교회’(‘복음의 기쁨’ 210항)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손을 내미시고 일으켜 세우려 하시고 군중들이 치유되어 행복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는 ‘다른 이의 거룩한 땅’에 접근하는 조심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행의 예술’입니다. 이 여정은 “힘차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이루어지고 존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시선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시선이 치유하고 해방시키며 그리스도인 생활의 성숙을 독려합니다.”('복음의 기쁨', 169항)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절름발이에게 한 일입니다. 절름발이를 바라보고,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하고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우고 고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어려운 순간, 죄의 순간, 슬픔의 순간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아라, 내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손을 잡읍시다.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주시라고 내어 맡깁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용한 수단을 신뢰하지 말고 부활하신 분과 관계인 진정한 부를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라는 바오로 사도 말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 이름의 힘을 나타내는 복음입니다. 우리 각자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는 무엇이며, 보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부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찬미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 삶에서 그분 사랑의 선물을 잊지 않기 위해 감사의 기억을 달라고 아버지께 청합시다. 다음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다른 사람이 일어설 수 있도록 뻗은 손은 예수님의 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예수님의 손입니다.

 

 

“여러분의 봉사에 진심 감사드립니다”

교종, 전 세계 사제들에 보내는 서한 발표

프란치스코 교종은 8월4일 아르스의 본당신부 성 비안네 선종 160주년을 맞아 전 세계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고된 노고와 낙심에도 매일성사를 집전하며 하느님 백성을 동행하는 모든 사제를 지지하고 가까이 있으며 격려한다고 말했다. 

서한 내용.

공동체의 일상생활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소란스럽지 않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 형제 사제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동행하고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매일 우리에게 얼굴을 내미는 이들께 감사드리며 여러분과 항상 가까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피곤이나 고된 노고에 찌들어 있을 때, 병에 걸렸거나 절망에 처했을 때, 주목받지 못하고 희생되었을 때와 같은 수많은 경우에도 주어진 사명을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로 받아들이며, 비록 앞으로 나가는 여정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삶 중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여러분 각자를 생각합니다. 최근 우리는 일부 성직자의 권력남용, 그리고 양심의 학대와 성 학대의 희생자들인 우리 형제들 외침을 더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침은 종종 침묵을 강요받고 소리 죽인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발생한 피해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존재 모두를 계속해 온전히 봉헌하는 수많은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부당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제들은 때때로 초대받지 못하며, 멀리 떨어져 있거나 방치돼 있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역이나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자비의 활동으로 만듭니다. 그들의 용기와 지속적인 모범에 대해 감사드리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교회 정화의 시기가 우리를 더욱 기쁘고 소박한 사람들이 되게 해 주는 한편, 머지않은 미래에 많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를 정화시켜 주시며 우리 모두를 그분께 되돌아오도록 회심시켜 주시기 때문에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우리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성소는 우리의 선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온 생명을 봉헌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체험하는 그 빛나는 순간으로 돌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품 안에서 성장한 ‘네’라고 응답하는 순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려움의 순간,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순간에 모든 유혹 중에서 가장 최악의 유혹은 절망으로 뒤죽박죽된 상황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 그분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도록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의 행보에 대한 감사의 완전한 기억을 우리의 삶에서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는 항상 강력한 무기입니다. 오직 우리가 용서, 인내, 끈기와 우리가 받은 연민에 대해서처럼, 사랑, 관대함, 연대와 신뢰의 모든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감사하고 관상할 단계에 이를 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과 사명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쇄신할 정도로 신선한 바람을 우리에게 선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됩니다. 불확실하고 덧없는 것을 좇는 문화와 사회에서 목숨을 내어 주는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또 사제들이 사람들을 돌보고 회심의 여정에 그들을 동행하면서 엄격주의나 방임주의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면서 매일 미사를 거행하고 고해성사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열성을 다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가슴속 깊이 감동하면서, 죄에 빠진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상처를 돌봐 주는 모든 순간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보다 더 급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곧, 고통받는 형제의 몸에 다가가고, 가까이 있으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마음이란 신자들과 하나됨을 느끼고 자신도 그들에게서 나온 존재임을 잊지 않는 영적인 맛을 들인 마음입니다. 또 믿음의 맛을 간직하지 않은 특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엄격하면서도 소박한 삶의 양식을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의 성덕에 감사드리며, 또한 큰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 빵을 집에 가져가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병자, 계속해서 미소짓는 연로한 수녀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부르심받은 사명은 괴로움, 고통, 몰이해에서 면제되는 게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주님께서 그것들을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를 그분에게로 더욱 동화시켜 주시도록 우리를 내어 맡기기 위해 그것들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목자의 마음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 알기 위한 좋은 테스트는 ‘어떻게 우리가 고통을 직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사실 때때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듯이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못 본 척하는 레위인이나 사제처럼 행동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때로는 합리적으로 고통에 접근해 분석하고 진부한 표현으로 도피함으로써 “인생이 그런 거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운명론에 자리를 내어 주는 일도 있습니다. 혹은 고립과 소외만 키우면서 좋아하는 것만 선택하는 시선에 다가서기도 합니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노스가 ‘악마의 가장 소중한 특효약’이라고 정의한 것, 다시 말해 동방교부들이 태만이라고 불렀던 ‘달콤한 슬픔’을 경계해야 합니다. 슬픔은 일할 때나 기도할 때 계속 나아갈 용기를 마비시키고 억울함과 적대감을 부추기며, 변화와 회심의 모든 시도를 무력화합니다. 습관성에 도전하는 한편 부활하신 분의 살아 있는 말씀의 외침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움직이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 무감각을 깨워 주시도록 청합시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어떻게 기쁨이 거듭나는지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노력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신뢰로 생겨납니다. 그 신뢰란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계속 행동하도록 자극하게 만든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제자들임을 떠올리는 ‘축복받은 불안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를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게 만드는 이들의 프로메테우스적 경향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사목자의 기도는 하느님 백성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구체화됩니다. 사람들의 상처에 기쁨의 표징을 가져다 줍니다. 기도란 주님이 우리가 만든 분이거나 선험적인 분이 아니라 희망의 여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바로 그분이심을 인정하며, 우리 모두를 쉽고 신속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답변을 찾거나 원하는 것에서 해방시켜 주는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당연히 인식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연약함을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 사명을 향해 나아가게 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건설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제적 여정을 식별해 줄 한 명의 형제를 두십시오. 함께 대화를 나누며 조언을 구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영적 동반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신자들과 사제들 혹은 공동체로부터 고립되지 마십시오. 마음이 닫힌 그룹이나 엘리트 그룹에 갇히지도 말아야 합니다. 용기 있는 사목자란 항상 바깥으로 나가는 사목자입니다. 부끄럼 없이 인간적인 불행에 가까이 머물기 위해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성찬례를 베풀기 위해 그들의 삶을 자신의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왜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나라가 오늘날 일으키고 싶어 하는 새로움을 기다리며, 열리고 신뢰 가득한 관계와 소통의 장인이 되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향한 시선을 열어 주고 현재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찬미를 가르쳐 주시는 성모 마리아를 관상하지 않고 감사와 용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리아를 바라보는 것은 따뜻한 애정과 사랑의 혁신적인 힘을 믿는 것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혹시 가끔 우리가 먼지투성이 역사의 길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며, 우리 계획과 우리 자신 안에 갇히고 고립되려는 유혹을 느낄 때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혹은 싸우고 기다리며 사랑할 의지도 없이 불평과 반대와 비판이나 비아냥거림이 우리 행동을 지배할 때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또 당신 백성 가운데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관상하고 기념하기 위해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온갖 ‘티끌’에서 우리의 눈을 정화시키도록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형제 여러분, 한 번 더,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에페 1,16) 이 감사가 우리의 형제들을 희망 안에 기름 붓는 사명에 한 번 더 용기를 주고 찬미를 불러일으키도록 합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선사하실 수 있는 연민과 자비를, 자신의 삶을 통해 증거하는 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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