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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그 머나먼 길

기사승인 2019.08.14  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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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8월 18일(연중 제19주일) 예레 38,4-6.8-10; 히브 12,1-4; 루카 12,40-53

오늘 예수의 발언에는 평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언급한다.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주님의 평화'(Pax Dominum)가 일순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예수는 왜 이렇게 강경한 발언을 던졌을까?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완벽한 상태는 평화일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평화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도 없다. 모든 이가, 모든 국가가 평화를 갈망하나 유사 이래 평화로웠던 시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어디선가 늘 분쟁이 있었다는 소리다. 지금도 전쟁광들이 만들어 내는 무기가 지구 곳곳에서 거래되고 있다. 비극이라면 이런 무기들이 수단, 시리아, 소말리아 할 것 없이 어린아이들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무기상을 지원하는 것은 특정 업체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이들의 상품을 ‘몰라서’ 팔아 주는 우리(세계인)도 일조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동네 작은 마트는 물론 식품, 카페, 전자제품, 자동차 어디서든 이들 전범 제품들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전 지구촌의 일상이 ‘전시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폭력주의자 J.C.아놀드는 첨단 무기로 전쟁을 억제하고 있는 소극적 평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이런 식의 평화를 일컬어 “약자의 목을 조르면서 ‘조용히 해. 평화를!’ 하고 윽박지르는 강자들의 평화로 폄훼했다. 알고 보면 평화란 것도 그들 손에서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게임 같은 것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투쟁해 온 역사적 인물들은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평화는 평화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평화를 해치는 강력한 동기를 불의와 차별, 빈곤과 좌절에서 찾았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는 ‘정의의 선언’과도 비견된다. 가난하고 슬퍼하는 이들, 주리고 목마른 이들, 박해받는 이들은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이의’(마태 5,9-10) 대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서 눈물이 그치는 날, 평화(행복)는 그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는 평화주의자인가, 전쟁 도발자인가? 국가의 안위를 심각하게 교란시키고 가짜뉴스를 퍼트린 그의 죄명은 몹시 중차대해 보인다. “도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죽을 것이고, 바빌론 임금의 군대에 넘어가 점령당할 것”(예레 38,2-3)이라 하니, 그것만으로도 임금과 대신들이 격분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온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다’며 ‘사형에 처하라’고 읍소한다. 아모스와 사제 아마츠야가 맞선 상황도 이에 못지않다. “아모스라는 자가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라 하니, 그가 하는 말을 더는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아모 7,10-11) 아모스는 결국 베텔에서 쫓겨났지만, 그가 이스라엘에 남긴 예언은 두고두고 뼈아프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너는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배를 가리라.”(17) 예언자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겉으로 보아선 누가 진정한 평화주의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가 없다. 평화는 보이는 것만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촉발시킨 '화이트리스트'는 한반도에 '노 재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하철 전동차 유리에 붙은 '노 재팬' 자보. ⓒ왕기리 기자

그래서 예수는 평화에 대한 모든 환상을 경계했다. 평화는 쉽게 획득되거나 도달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가 ’가족‘에게서 균열을 직시한 것도 평화가 얼마나 쉽게 조작되고 파괴될 수 있는지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샬롬'(평화)의 본고장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세계 곳곳은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과 테러의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최근엔 대한민국도 일제강점기의 망령과 한판 맞장을 뜨는 중이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시기에 제2의 독립운동(?)이 불어닥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군국주의자 아베정권이 강제징용배상 판결에 불복해 촉발시킨 ‘화이트리스트’는 한반도에 격렬한 ‘노 재팬'(No Japan)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이 땅의 일제 잔재들이 하는 행태다. 그들은 일제강점기가 근대화를 이룬 시기라며, 강제징용과 위안부 강제노예는 자발적 징용, 자발적 매춘이었다며 조선의 아들과 딸들을 능멸하고 있다. 목하 대한민국이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서”(루카 12,52-53)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평화를 지켜 낸다는 것은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고, 바로 세우는 일에 부모나 자녀의 논리가 우선될 수 없다. 진실은 그 어떤 논리나 힘으로 휘둘려서도, 휘둘릴 수도 없다. 순서는 분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상처에 대한 치유가 먼저다.

평화주의자 데즈먼드 투투 주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잔인한 인종차별 종식을 아프리카의 오랜 전통, ‘우분투’에서 찾는다. 우분투는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베푸는 관대한 용서’의 정신이다. 투투 주교가 평생 포기하지 않은 선의 승리도 우분투에서 왔다. 그는 순진할 만큼 이 단순한 진리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한 일이 없었다. 그가 세상에 대고 인터뷰할 때만 해도 그의 이런 확신에 낙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봄이 온 것이다. 인종차별 종식이 선언되고,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평화가 찾아왔다. 용서는 상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반드시 전제한다. 제대로 된 친일청산도, 피해 배상도 우선은 피해자들에 대한 통렬한 사죄가 먼저다. 평화는 그들이 선언할 때 비로소 평화일 수 있다. 정의와 공정, 자비가 평화의 또 다른 이름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선을 가장한 중립지대로 평화를 치환시킬 수는 없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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