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8월 18일(연중 제20주일) 예레 38,4-6.8-10; 히브 12,1-4; 루카 12,49-53

성경은 하느님 사랑의 선포가 항상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되풀이 말하며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뿌리에 닿기

루카 복음서의 12장은 제자들에게 충고와 주의를 주고 있다. 예수님은 계속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그분의 사명에 대한 반대가 더 공격적이 되는 것을 보고 그 결과가 어떠리라는 것을 예상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준다. 이번 주일의 말씀은 역설적 표현으로 쓰여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음모로 가득찬 현실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예수님은 평화, 심오하고도 지속적 평화의 사자이며, 단순히 껍데기에 의존하거나 이름만 있는 평화가 아니다. 평화는 정의,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 특히 가장 힘없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를 선포한다는 것은 기존의 불의한 사회구조로부터 혜택을 받는 이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주의와 그에 따르는 결과들은 하느님의 딸, 아들이라는 우리의 조건에 근거한 우애를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지적한 내용이다. 그분의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그분은 불의 세례(루카 3,16)를 받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분은 고통과 죽음 속에 던져질 것이다. 예수님이 이 고통을 원한 것은 아니나, 맞닥뜨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평화 때문에 지불해야 할 대가는 이미 예수님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루카 12,49-50)

평화는 사랑의 열매이며,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억압의 원인들을 없애는 참다운 공동체가 이루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믿음이 충만하건 부족하건 간에- 연대와 정의의 동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면 마치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악의 근원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현재 특권들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하느님나라 선포가 불행하게도 이미 분열이 실제로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분열의 원인에 닿음으로써 그것을 없애고자 한다. 그 원인은 구체적이고 투신적인 사랑의 결핍이다. 이 원인은 결국 주님께로 돌아서거나 아니면 등을 돌리는 선택을 요구한다.(루카 12,51-53)

권리에 대한 존중. (이미지 출처 = Pixabay)

예언자의 고난

교부들은 예레미야를 그리스도의 예시적 모습이라고 자주 말해 왔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대신들이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계명을 따랐다고 죽이려는 것을 본다. 유약한 치드키야 왕의 대신들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국가의 반역자로 보고 있다.(예레 38,4) 오늘날 많은 사람처럼, 그들은(대신들) 진리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발해야 할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건 거짓 중에서도 최악의 거짓말이다.

분열은 예레미야나 예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모두 그 분열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진리를 숨기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언하는 사명 때문에 비밀스럽게 공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정한 화해를 원할 따름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권력가들로부터 명예나 보상도 원치 않는다. 누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히브 12,2)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증언해야 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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