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8월 25일(연중 제21주일) 이사 66,18-21; 히브 12,5-7.11-13; 루카 13,22-30

지난해 8월 우연히 원고청탁을 받으면서 이곳에 강론을 기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매주 기고하는 것이 아님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면서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화요일이 되면 벌써부터 이번 주는 어떤 내용으로 풀어 나가야 할까 하는 걱정이 여전히 유효함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것이 꽤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쓴 것이 지난해 연중 19주일이고 이번 주일이 연중 제21주일이니 꼬박 1년이 되었습니다. 코너의 제목을 ‘삶으로 말씀 읽기’라고 정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뛰어난 신학자도 아니고 성경 말씀을 주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사제로서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느꼈던 것들을 말씀에 녹여 보고자 하는 저 나름대로의 크고 무모한(?) 의도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의도가 무모했기에 글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본당신부님께서 하시는 강론을 밥에 비유하면 제 강론은 컵라면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험은 물론 여러모로 부족한 사제의 글을 읽어 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1년 전 제가 요한 복음 6장의 말미를 묵상하면서 제시했던 주제는 바로 ‘거리 둠’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복음에서 끄집어낸 주제 역시 바로 거리, 간격입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오늘 문제가 되는 것도 물리적 거리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문을 닫아 버린 집주인에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외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보다 주님 곁에 가까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야기는 냉철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오히려 그들은 주님 곁에 있으면서 주님의 의향대로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어도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불의를 저지르면 구원은 멀리 있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떨어져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용기 있는 떠남. (이미지 출처 = Flickr)

사실 주님은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물리적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구원에 있어서 물리적 거리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로 제시된 이사야 예언서도 그러합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 당신이 모든 민족을 위한 이임을 천명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뜻에 맞는 이들을 먼 곳으로 보내 그 사람들도 당신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이사 66,19) 결국 구원은 주님 곁에 머무르기만 한다고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가지고 밖으로 나아가야 함을 이사야 예언서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끝내면서 교황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구원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과 참다운 형제애 사이의 이 끊을 수 없는 유대는 여러 성경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메시지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우리 삶과 공동체에 실질적 효과를 준다고 확신하지 못한 채 거의 기계적으로 이를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이러한 익숙함은 매우 위험하고 해롭습니다‘('복음의 기쁨', 179항) 익숙함에 머무르기만 하면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좋다고 해서 곁에만 있으면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떠나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 떠나 내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혹시 익숙함에 젖어 움직이기가 두려우십니까? 주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 우리는 그 움직임에 대한 용기를 청해야 합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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