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영국의 서쪽 해안 지방에서 바다를 보면서야 이해된 회화들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터너를 비롯한 많은 영국 화가의 작품에 등장한 그 하늘과 바다는 상상도 과장도 아닌 정말 그들이 눈으로 본 장면들이었고, 변화무쌍한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그것을 그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 안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삶에 대한 질문을 담아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하느님”이 탄식처럼 나왔습니다.

‘눈먼 소녀’, 존 에버렛 밀레이. (1854-56) (이미지 출처 = 영국 버밍엄 미술관 홈페이지)

이 그림은 지난 연재 글(2019. 6. 26일자)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영국의 천재 작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또 다른 작품입니다. 자연 경관이 홀로 주인공인 작품은 아니지만 한 화면에서 하늘과 땅의 공존이 묘합니다. 전면 인물의 붉은 빛과 노란 빛의 땅에서 발산되는 밝은 빛과 대비되어 저 언덕 위 검푸른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진한 쌍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비가 온 직후일 거라 추정한다면 지금 소녀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도 방금 큰비가 지나갔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눈먼’ 언니와 ‘눈이 보이는’ 동생으로 보이는 두 자매는 그 묘사된 행색으로 보아 손풍금 연주로 구걸하며 떠도는 이들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언니의 목 밑에 붙은 하얀 쪽지에는 “Pity a Blind"(불쌍한 눈먼 이)”라고 써 있습니다. 구걸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눈이 보이는 누군가 붙여 주었을지 모를, 이 소녀 삶의 비극성에 도장을 찍어 주는 소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초대하는 단서가 됩니다.

저 놀라운 무지개를 보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가여운가! 쌍무지개는 그 안타까움을 더해 주는 설정으로 소녀의 등 뒤 저 멀리 있습니다. 이보다 더 신기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광경이 있더라도 이 눈먼 소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겠구나, 바로 곁의 동생이 저 무지개를 향해 돌아보는 순간이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합니다. 제가 이 그림의 강렬한 대비적 설정을 보며 처음 가졌던 느낌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그림이 다시 떠올라 가만히 들여다보며 발견한 의미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햇볕을 가득 받으며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얼굴. 굳이 언니의 두건 속에 머리를 함께 집어넣고 손을 꼭 잡고 있는 동생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면 방금까지 오던 비구름이 저 언덕 위로 넘어갔을 거라, 그래서 방금까지 흠뻑 비를 맞았을 거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온 뒤 가득 비치는 해를 향한 언니의 얼굴은 진정 그 빛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녀의 붉은 두건에 붙어 앉아 있는 나방은 이 소녀가 얼마나 빛 속에 깊이 머물러 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땅에 핀 꽃과 풀을 부드럽게 만지고 있는 소녀의 오른손이 보입니다. 소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관상’ 기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현상을 보는 것, 바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확한 사실 파악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내재한 본질,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진정 ‘보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상은 이 본질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통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지개를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구약에서도 무지개를 두고 ‘하느님의 약속’이라 했습니다.(창세 9,13-16) 그런데 무지개를 보았으나 ‘하느님의 약속’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면, 즉,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그 무지개’를 ‘보았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작품에 대한 해석 중에서도 이 쌍무지개를 성경 속 ‘그 약속’의 의미로 보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이 무지개는 ‘그 약속’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그림이 다시 떠오른 것은 사실 요즘 그 확산 속도와 정도가 심하게 가속화 된,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이야기와 현상들, 본질이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 찾는 것조차 시도하고 싶지 않도록 피로하게 만드는 거짓들의 폭주 가운데에 고민하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엉킨 소음들 가운데에서 무엇이 사실이며 진실인지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이 거짓들 속 사실을 찾고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가? 이 노력은 어디에 닿아 있는가?

이 질문들은 제 시선이 향하는 세상이 어디까지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하게 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가? 이 보이는 세상을 만드신, 그 보이지 않는 본질이신 하느님을 믿고 알고자 하는가? 나의 사랑은 정녕 거기에서 나오는 것인가?

비록 유한한 존재로서 갖는 한계 안에서이지만 내가 ‘세상’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문제의 핵심도, 그에 따른 문제의 파악도, 해결도 달라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가 바라보는 현상의 본질은 분명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림을 보는 우리는 소녀의 등 뒤 무지개를 봅니다. 그런데 소녀는 무지개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보고’ 있습니다.(집회 43,11-12; 에제 1,28) 딱히 다른 말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눈먼 소녀는 분명 무지개를 보지 못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지극히 과학적 현상으로서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조건들, 비구름과 수증기와 태양과 그 때와 자연의 질서를 만드신 분은 하느님입니다. 지나가는 비를 피할 수 없어 흠뻑 젖고, 기적같이 떠오른 무지개 색을 볼 수도 없지만, 그 주인이신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빛 자체 안에 마음껏 머물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무지개의 주인을 만나 보았나요. 저는 아직입니다. 이 빗속 떴다가 사라질 무지개를 보든 보지 못하든, 주인이신 그 한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빛을 통해서야 이 ‘보이는’ 것들을 진정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왜 보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마태 6,22-23; 루카 12,34-36) 거짓이 더욱 큰 소용돌이를 만드는 세상에서 현상을 보는 데에 시선이 멈추는 눈은 ‘보고 있다’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눈으로 그 소용돌이 너머 본질을 보고 함께 손 잡을 수 있는 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더 자문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야 말로 세상에 오신 빛이며 길임을 믿고 그분을 따른다 한다면, 무엇을 보고, 아파하고, 싸우고, 연대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자문하기를 멈추지 말고, 가난한 진실 위에 앉아 하느님을 갈망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보는 눈은 대체 무엇이 다른가,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바르게 해야 할 현상의 분석을 넘어 하느님나라로서의 세상의 본질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마태 16,2-3; 루카 12,54-56) 무엇을 달리 보고 세상에 외쳐 ‘등경 위 작은 등불’이라도 감히 되겠는가.(마태 5,15; 마르 4,21; 루카 8,16;11,33) “Pity a Blind”는 어쩌면 저 무지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소녀가 건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서강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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