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경동현]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교회통계가 말하는 것

해마다 4월 전후로 전년도 연말 기준 한국천주교회 통계가 발표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4월 10일 주교회의는 "한국천주교회 통계 2018"을 발표했다. 교회통계는 사목정책을 고민하는 교회 관료가 가장 많이 관심을 두지만, 통계가 사목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통계 수치의 의미에 대해서는 교회 언론에서 해마다 다루어 주니, 해가 갈수록 양적 면에서 위기의 징후가 있다는 사실은 교계 활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대체적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2018 교회통계를 재료 삼아, 통계가 말하는 한국천주교회의 모습과 교회통계가 말하지 않는 복음과 제도 사이의 불일치, 그 틈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교회가 쇄신할 방안은 없는지 모색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지면상 모든 영역의 통계를 다루지 않고,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인 평신도와 관련된 통계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표 1>에서 보듯이 2000년 이후 ‘신자 총수’와 ‘신자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더구나 정부 주도 통계조사인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이하 인구총조사)에서 천주교 신자 수가 교회통계보다 50여만 명이나 많은 것으로 확인되어, 머지않아 불교를 추월하리라는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2017년 1월 발표된 ‘2015년 인구총조사’ 결과는 천주교가 자체 집계한 교회통계보다 신자 수가 3분의 1이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큰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정부 통계와 관계없이 교적 자료를 바탕으로 매년 발간하는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신자 총수’는 연평균 2.3퍼센트씩 증가했다. 2000년 당시 400만 명을 웃돌던 신자 총수는 지난해 586만여 명으로 늘어나 18년간 44.1퍼센트의 증가세를 보이면서, ‘신자 비율’은 8.8퍼센트에서 11.1퍼센트로 늘어났다. 이런 증가 추이라면 3년 안에 6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본당 수도 비슷한 추이로 늘어났는데, 2000년 1228개에서 2018년 1747개로 신자 총수의 증가에 비례해 증가했다고 확인된다.

하지만 외형상 크게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교회통계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허수가 많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일단 신자 증가율은 2000년 3.2퍼센트에서 계속 하락해 2018년에는 0.9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새 영세자 수는 17만여 명(2000년)에서 8만여 명(2018년)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하는 상황이다. 본당마다 연중행사로 치르는 견진성사자 수도 7만 3809명(2000년)에서 4만 2455명(2018년)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고, 주일미사 참석 신자 비율은 29퍼센트(2000년)에서 18.3퍼센트(2018년)로 2010년 이후 8년째 내리막 중이다. 표에 담지 않았지만, 신자들의 연령별 비율 분포를 보면 5명 가운데 1명 정도가 65살 이상 노인 신자(19.4퍼센트)로 확인된다. 반대로 19살 이하와 30대, 40대 신자 비율은 2012년부터 꾸준히 줄었다. 50대 신자 비율도 2014년 이후로 계속 줄어 고령화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막을 알고 본다면, 충격적이었던 ‘2015년 인구총조사’ 결과를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동안 이러한 성장 정체 현상에 대한 대안으로 다양한 사목 방안과 프로그램들이 시도되었지만, 교회통계는 쇠퇴의 징후가 갈수록 뚜렷해진다는 사실을 전한다.

교회통계가 말하지 않는 것

지난 18년간 교회통계에서 보듯이 내적, 외적 성장 정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위기의 징후는 이미 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통계 변화에 부응한 것은 늘어나는 신자 수에 맞춰 본당 수를 늘린 것 정도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을 외치던 1980년대의 산아제한 정책이 30년도 지나지 않아 인구 절벽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걸 보면, 본당 신설과 같은 교회 부동산의 확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자 없는 공간을 걱정해야 할 처지를 예상치 못한 결정으로 치부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본당 신축 말고는 성사 참여도, 공동체의 활성화도 억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교회통계에서 확인되는 위기의 징후가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과 달리 위기의 해법 찾기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통계가 그저 통계로만 남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야 한다면서도 해법은 “교회 성장 정체, 원인부터 살펴야”(<가톨릭신문> 2019년 4월 28일자 사설 제목) 한다는 원론적 차원의 언급만 반복되는 현실이다. 잘 나간다는 프로그램이나 스타 종교인에 의지해 넘어설 수 있는 위기가 아니다. 퍼포먼스는 늘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미지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4년 방한 당시 한국천주교회에 던졌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충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가 되어,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그 안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할 지경”에 이르렀고,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웰빙 교회”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1)

좀 더 근본적 해법은 무엇일까? 2014년 교황의 충고에도 한국천주교회는 꿈쩍하지 않았다. 한 연구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와 한국천주교회의 불일치를 지적하기도 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교황, 방탄이 되지 않아 언제든 저격의 위험에 노출된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교황,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이 ‘새로운 순교’라고 주장하는 교황, “교회가 동성애·낙태·피임 등을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더욱 자비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혼전 동거 커플의 결혼 주례를 서는 교황, 미혼모의 아이에게도 세례를 주는 교황....

우리는 한국천주교의 현실이 그러한 교황의 행보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불일치에 주목이 일어나야 할 장소는 다름이 아닌 ‘한국천주교 내부’일 것입니다."2)

영세자와 미사 참례자를 비롯한 성사 참여의 뚜렷한 쇠퇴는 바로 한국천주교회 내부에서 이러한 불일치의 현실을 참아내는 신자들의 반응이다. 대부분 열심한 신자들이 이제 복음과 교회 제도의 ‘불일치’를 더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들리지 않는 외침인 것이다.

틈에 관한 이야기

복음과 제도 사이의 불일치, 벌어진 틈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이 틈을 좁히려는 노력을 우리는 ‘교회쇄신’이라 부른다. 1980년대 천주교 사회운동은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라는 두 개의 깃발을 세웠다. 그리고 40여 년이 흘렀다. 사회복음화 측면에서는 교회사를 넘어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교회쇄신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걸음마 단계여서 문제가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것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힘겹다. 교회통계로 나타난 쇠퇴의 징후는 교회쇄신이 어렵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려면 교회공동체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과 쇄신이 전제된 비전이 필요해 보인다.

오늘날 교회공동체가 처한 위기의 해법 차원에서 볼 때, 비전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요청된다. 첫째, 신자와 수도자, 사제가 ‘함께하는 사목’으로 전환하기 위한 비전에 대한 모색이다. 이 비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핵심 개념인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과 최근 국제신학위원회가 말하고 있는 ‘공동합의성'(synodality) 개념과 연결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이후 줄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야전병원’으로서 교회 등 ‘새로운 교회’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용어를 유행시켜 왔다. 최근에는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 시노드 또는 ‘시노드로서 교회'(synodal Church), 또 그 과정으로서 ‘공동합의성’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평등한 ‘친교의 공동체’로서 합리적 교회상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개혁 조치를 진행 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백성이 지닌 ‘신앙감각'(sensus fidei)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계가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에서 배우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성직자와 더불어 토론하고 함께 의사결정을 내리는 ‘합리적 교회’로 발전해 갈 수 있다고 본다.

둘째는 세상 속 교회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지역사회와 본당을 아우르는 통합적 비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사실 두 번째 전망은 첫 번째 전망보다 노력과 시행착오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전망과 관련해 많은 사목자(수도자, 평신도 포함)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를 세우는 데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곧 제도로서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여 그 경계를 수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은 ‘쓸데없는 일’, ‘불필요한 일’로 여기거나 해당 직무를 맡은 특별한 사람의 일로 여기기 십상이다.

이 세상 안의 교회라는 통합적 전망이 충실하게 적용된 사례 중 하나로 과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의 ‘아시아사회사목연수회'(Asian Institute for Social Action, AISA) 사례를 들 수 있겠다. FABC 사무국은 1970년대 초부터 각국의 주교들을 대상으로 연수회를 개최하여 아시아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이를 정치경제학적이고 사회문화적으로 분석한 뒤 신학적 성찰을 통해 실천계획을 수립하는, ‘사목적 순환'(pastoral spiral)이라고 부르는 실천적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AISA는 이러한 실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1987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이중 서울에서 열린 제3차 AISA는 한국천주교회의 ‘하느님 백성’이 모여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공동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본당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더 쉽고 크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과제로 제시되었다. 이를 통해 빈민 지역의 현장과 본당의 연대를 통해 본당 공동체가 지역 빈민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는 인식도 갖게 되었다. 3차 연수를 주관한 강우일 주교는 이 연수가 지속하기를 바라면서 가난한 이의 교회를 지향하는 쇄신의 일꾼들이 양성되기를 기대했으나,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성찰할 때 AISA의 정신이 지속되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앞선다. 그러나 지역과 본당을 아우르는 통합적 비전을 위해서는 다시 살려 가야 할 소중한 자산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새로운 교회를 위한 통합적 전망

이상 언급한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함께하는, 그리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망은 새로운 제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오랜 기간 묵은 이 제안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이 제안이 지닌 근본적 특성 탓이 크다. 바로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답한 대로 살아갈 것을 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제안이 공허했던 이유는 실천 없는 외침이었기 때문이고, 이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손과 발, 몸을 움직이는 실천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문제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교회쇄신을 위한 노력들은 인식의 전환이라는 근본 문제를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효과적이라 판단되는 프로그램의 개발이나 사례 발굴과 같은 조금은 지엽적인 부분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닌가 싶다. 근본적인 처방이 되지 못하니, 교회통계가 보내는 쇠퇴의 신호를 그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몇몇 교구에서 ‘통합사목’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자각하는 징후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직 구체적 사목의 결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07년 처음 논의되었다가 중단된 ‘통합사목’을 최근 들어 몇몇 교구에서 다시 언급하였다. 필자는 아마도 그 이유가 ‘통합적 전망’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인식이 교회 안에서 생겨난 결과라고 본다.

의정부교구의 경우는 중장기적이면서도 포괄적 시선으로 사목 영역 전반을 재검토하여 분절화된 사목 시스템을 연계하고 지역과 지구, 본당의 소통과 협력을 도모하려는 고민이 반영된 결과로 통합사목을 말하고 있다.("2019 의정부교구 사목지침서") 수원교구의 경우는 모든 세대와 계층을 유기적 관계망 안에 놓고 접근하는 ‘유기적 협력사목’의 개념으로 통합사목을 새로운 사목 방법론으로 제시한다.("2018 수원교구장 사목교서") 또한 최근 교구 시노드를 마친 대전교구는 시노드 최종문헌에서 ‘사제와 평신도의 공동 노력의 필요성’, ‘보편 사제직의 강조’, ‘시노드 사목의 실현’과 이를 구현할 ‘통합사목연구소’의 신설을 말하며, 나아가 의사결정에서 평신도가 사제의 자문기관이 아닌 의결기관에 참여하는 동반자 역할을 강조한다.("대전교구 시노드 최종문헌") 이러한 노력으로 두 차원의 통합적 전망이 교회 구성원에게 내면화할 때 복음화 사명의 새 지평이 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메시지 일어나 비추어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5, 26쪽.

2) 이창익, '교황 프란치스코와 한국천주교의 틈에 관한 이야기', <불교평론> 60호(2014년 겨울), 278-300쪽 참조.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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