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9월 1일(연중 제22주일) 집회 3,17-18.20.28-29; 히브 12,18-19.22-24; 루카 14,1.7-14

보상을 바라지 않기

주님은 바리사이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초대되어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가까이 지켜보고 싶다.(루카 14,1)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분을 공격하기 위하여 언젠가 나타날 약점들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침으로써 그들을 놀라게 하고 말을 잃은 그들을 떠난다.(14,2-6)

뿐만 아니라, 손님들이 높은 자리(아마도 중요한 식사였던 것 같다)만 찾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은 신랄한 메시지를 담은 비유를 그들에게 말한다. 비유는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전도라는 말의 의미다. 즉 하느님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무시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교회인 우리들은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교회의 고위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세속적 명예나 심지어 명목뿐인 한직마저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함정에 떨어지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루카 11,43) 여전히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첫째 자리와 꼴찌 자리. (이미지 출처 = Pexels)

겸손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비밀

주님에게서 결점을 발견하려고 매복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불평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마땅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니 예수님이 계속하여 그들의 발밑에 있는 깔개를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친구들”이나 “친척들” 혹은 “부유한 이웃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시한다.(루카 14,12) 대신, 그들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14,13)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들이 소외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알아들어야 한다. 병의 심각함으로 인해서, 이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까지 여겨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받은 호의를 되돌려 줄 길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초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상의 사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히브 12,22)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루카 복음서(14,15-24)에서 이어지는 비유는 기존의 초대받은 사람들의 명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나라의 무상성을 강조하고 있다.

“온유한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보여 주시는”(집회 3,20) 분이 바로 하느님이다. 우리는 똑같은 주제를 마태오 복음서 11,25에서도 발견하는데, 이는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명예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 중요한 존재라고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들, 권력에 대한 사랑과 높은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모든 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나라의 잔치에 초대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넘어질 때에 도움을 얻지 못할 것”(집회 3,31)이다.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기 때문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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