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삶 - 송승연]

'55 스텝', 빌 어거스트, 2017.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나를 정신병원에 가둘 때,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저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그들은 괜찮을 거라고 말했어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과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죠.”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주제로 한 영화 ‘55 Steps’(2017)의 주인공 엘레노어 리즈가 자신을 찾아온 인권변호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온 대사 중 일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목소리’에 대해선 자연스레 주어진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 대사처럼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 속에서 정신장애인의 목소리는 배제될 위험이 농후하다. 미쳤다는 이유로, 비이성, 비합리성이라는 틀 속에서 말이다. 이러한 불평등을 미란다 프릭커(Miranda Fricker, 뉴욕시립대 철학과)는 ‘인식론적 부정의’라고 정의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주장, 생각, 경험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에서의 차별을 ‘증언적 부정의’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권리에서의 배제를 ‘해석적 부정의’로 개념화하였다.

이처럼 정신장애인은 억압적이지만, 쉽사리 가시적이지 않은 ‘인식론적 폭력’에 휩싸여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제시된 것이 바로 ‘옹호'(advocacy)다. 옹호는 침묵당할 수 있는 목소리에 권력을 부여하고, 민주적 참여를 도모하여 사회정의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국에서는 당사자운동의 영향으로 정신장애인의 차별, 강제치료, 권리침해에 대응하기 위해 1980년대 중반 옹호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대표적으로 2007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독립적 정신건강 옹호서비스(Independent Mental Health Advocacy, 이하 IMHA)가 있다. 

IMHA는 영국 정신보건법에 의해 강제적 치료(강제입원, 지역사회치료명령 등)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성과를 분석한 연구결과(Newbigging & Ridley, 2018)에 의하면, “옹호자는 내게 목소리를 주었고, 내 삶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IMHA서비스 이용자)라는 긍정적 성과와 더불어 정신장애인의 부정적 편견(예를 들어 신뢰성 부족 등)을 해결함으로써 ‘인식론적 주체자’로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정신장애인의 목소리를 보장하기 위한 권익옹호서비스로 ‘절차보조사업’이 보건복지부 지원으로 시범운영되고 있다. 절차보조사업의 목표 또한 당사자의 ‘자기결정권’ 행사 보장을 통해 자기존중감, 치료과정에서의 주도성을 회복할 수 있게 지원함으로써 정신질환 치료 환경을 일반 치료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도록 조성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형 권익옹호사업은 영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IMHA에 비해 진일보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IMHA 관련 연구를 보면 법적권리옹호에 다소 치우침으로 인해 당사자의 ‘살아 있는 경험’에 기반을 두는 자기옹호의 단절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한 인식론적 부정의 중 증언적 부정의 보장에 치중한 나머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에서의 차별, 즉 ‘해석적 부정의’를 놓칠 수 있다는 의미다.(Newbigging & Ridley, 2018) 

현재 한국의 절차보조사업은 경험과 공감의 힘이 있기 때문에 본인의 관점에서 듣고, 설명하고, 전달하는 역할 수행에 최적의 조건일 수 있는 ‘당사자활동가’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오히려 IMHA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향성, 즉 목소리에 중점을 두는 것과 더불어 경험적 지식까지 보장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여질 권리'와 '정치적 경청'.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러나 ‘경청’이 없다면 정신장애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즉,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목소리’를 외치는 것만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공허한 메아리를 형성할 뿐이다. 수잔 빅포드(Susan bickford, 노스캐롤라이나대 정치학과)는 "민주주의 불협화음"(1996)이라는 저서를 통해 ‘정치적 경청'(political listening)에 대해 언급한다. 경청은 청자와 화자의 입장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드러날 수 있는데, 그러한 차이와 갈등을 통해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강제로 결정을 내리면서 어느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와 화자가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지향하며, 이들은 ‘다르지만 평등한 참여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만약 어느 쪽이 설득되거나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지속적 대화는 새롭게 형성되는 ‘함께하는 행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국의 IMHA와 한국의 절차보조사업은 정신병원 입, 퇴원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현재 정신장애인의 현실에서 강제적 치료와 관련된 권리침해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관점을 확장할 필요도 있다. 가령 1999년 미국의 옴스테드(OLMSTEAD) 판결은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에서 살 권리'(주거권, 복지권 등)를 쟁취한 옹호 사례다. 이러한 긍정적 권리를 지원하는 옹호서비스는 사회적 포용이 강화되는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에서는 강제적 치료를 요구할 경향이 적어질 수 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신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옹호는 ‘말하여질 권리'(right to be heard)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정치적 경청’의 실현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으며, 정신장애인의 차별과 편견의 뿌리는 깊고 튼튼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차별들(인종차별 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를 위해선 우선 우리 자신의 편견을 인식해 보고, 타자의 설득에 열린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배우려는 마음가짐이다. 특히 필자를 포함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보다 열린 마음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 어쩌면 그 틈에서 긍정적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송승연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 수료.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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