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9월 8일(연중 제23주일) 지혜 9,13-18; 필레 9ㄴ-10.12-17; 루카 14,25-33

‘상처받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참 많이 듣는 이야기, 참 많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유명했던 책 제목도 있지요. 오늘 글과 맥락은 다르지만 한 정신건강의가 쓴 "상처받을 용기" 그리고 어느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유명해지게 된 책 "미움받을 용기".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은 2권까지 출간되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던 책입니다. ‘상처받음’의 문제. 이 문제는 본당을 비롯한 신앙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세상 속에서 받은 상처를 하느님의 위로로 치유하러 오는 하느님의 집인데도 그곳에서 마저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에 의해서 상처 입는 분, 수녀님과의 관계에서 상처 입는 분, 같은 레지오, 같은 신심단체, 내가 맡고 있는 직책의 전임 형제자매 등등 수많은 이유로 교회 안에서도 상처 입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해소에서도 죄를 고백하기 전에 우선 내가 죄를 짓게 된 이유를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요. 그러면서 누구에게 상처 입은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내가 누구로 인해 어떤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교우 분들만 그럴까요?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부님도 그러하시겠지만 저희 동기 신부들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집니다. 서로의 생활을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며 친교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거의 빠지지 않은 이야기가 바로 상처받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서 그리고 제도의 한계로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곤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본당을 비롯한 신앙공동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바로 그곳에서 상처 입은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상대방의 욕심을 위해 내가 희생되는 경우 혹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생기는 상처도 있겠지만 하느님 때문에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대로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 올바른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 속에서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우리는 그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필레 10)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편지를 통해 주인에게서 도망쳐 왔다가 돌려보낼 종인 오네시모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필레몬에게 배려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 오네시모스를 ‘내 심장과 같은 이’(필레 12)라고까지 표현하며 자신과 같은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 ‘주님 때문에 상처받은 이’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그 모범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상처. (이미지 출처 = Pixnio)

복음으로 배치된 루카 복음 14장 후반부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가족을 미워하는 것, 결국 주님께서는 당신을 제대로 믿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에게서마저 상처받을 용기를 가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제대로 된 믿음을 위해 우리가 청해야 될 것은 주님 때문에 주님과 함께 상처받을 용기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상처받은 분이셨음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태어나는 그 물리적 공간에서부터 상처 입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성부 때문에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의 결정적 상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피와 땀이 묻은 십자가 십자가는 상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상처로 인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이번 주일 복음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당신과 닮은 그 상처를 안고 당신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상처받을 용기를 가져 봅시다. 내가 받은 그 상처가 하느님을 제대로 믿기 위한 나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상처받은 이웃을 위로할 용기도 가져 봅시다. 강론의 초반부 예화와 같이 저 역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설 때 마다 빠짐없이 느껴지는 선배 동료 신부님들의 위로와 격려라는 그분의 섭리 속에서 다시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과 함께 받은 내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상대방 속에서 있는 그 상처도 함께 볼 수 있는 사랑, 서로를 위로해 주는 신앙인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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