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5]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는 모든 연령층의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특별히 어린 시절 아이에게 부모의 지지와 격려는 절대적이다. 부모가 그 시기에 어떤 태도로 양육했는가는 자식의 인격-감정과 이성-과 자존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순간들에 엄니가 취했던 너무도 객관적이고 차가웠던 태도는 내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나를 대하는 엄니의 태도는 인생 초반기 자존감을 형성할 때 장애로 작용했고, 그 이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마다 낮은 자존감으로 드러나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내면의 해소되지 않았던 갈증, 분노의 원인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가족과 창경궁 나들이. 한창 젊었던 엄니-흰색 한복에 머리카락을 말아 올린-의 모습이 기억에 가물가물한데, 비록 빛이 바랬지만 이 사진이 있어 다행이다. 엄니 왼쪽에 단발머리를 한 우리 집안의 기둥인 언니, 나들이의 유일한 남자 딱지와 구슬 따기의 왕이었던 막내 오빠, 그 오른쪽에 양 갈래로 머리카락을 묶은 ‘빨간머리 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나, 엄니 옆에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서 함께 살아남은 동서인 큰어머니, 그리고 언니 앞에 있는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는데 한 여자아이가 우리와 함께 창경궁에 소풍을 왔다. ⓒ최금자

어린 시절 엄니는 자식을 칭찬한다거나 애정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막내인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무던히 애썼던 어린 나에게 엄니는 참으로 냉정했다. 비록 내 자식이라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엄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 엄니의 교육철학(?)이었던 것 같다. 그러한 객관성을 받아들이기에 내 나이는 아직 어렸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몇몇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피부 접촉에 민감했던 엄니가 잠든 사이 살금살금 다가가 젖꼭지를 만지자마자 내 손을 매몰차게 걷어 내는 행동에 무척 상처를 받았다. 막내인 나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던 엄니가 계모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몇 학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반에서 10등 안으로 진입한 성적표를 보고 너무도 기뻐서 시장에서 쌀장사를 했던 부모님 가게로 무작정 뛰어갔다. 엄니에게 자랑스럽게 성적표를 내밀며 ‘아이구, 내 새끼 공부 잘했네’라며 엉덩이를 두들겨 주는 칭찬을 기대했던 나에게 엄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위해 공부하냐, 너를 위해 공부하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서운해서 울고 싶었다. 세 번째 사건은, 내 중학교 졸업식에 온 엄니가 주근깨 가득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남들은 다 이쁜데, 넌 왜 이리 못생겼냐”라는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아니 엄니는 내 졸업식에 왜 온 거야?’라며 엄청 화가 났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라고 하던데 축하 대신 나에게 독화살을 꽂은 그날의 엄니를 나는 잊을 수 없다. 네 번째는,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보고 낮은 점수에 속상해 내가 울자 엄니는 “네가 시험 못 보고 울긴 왜 우냐?”라며 위로 대신에 공부 못해서 나온 당연한 결과임을, 공부 못한 나임을 아프게 인식시켜 주었다.

엄니는 냉혈한 인간이고 본인만 완벽하다고 믿는 여자라는 나의 평가에 대해 다섯 살 위인 언니도 무한 긍정한다. 아버지와 함께 약수동 시장에서 장사했던 엄니 대신에 언니는 어린 나이에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고 손아래 두 동생을 돌봐야 했다. 한창 자랄 나이에 떠맡기에는 무거운 짐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던 딸에게 고생한다며 칭찬 한마디 하지 않았던 엄니에 대한 서운함이 언니에게 참으로 컸다. 언니라기보다 엄마와 같았던 그녀를 나는 종종 ‘작은 엄마’라 부른다. 내가 폐결핵에 걸렸을 때, 언니와 전화 통화하던 중 약수동 산꼭대기에 살던 일을 회상하다가 엄니한테 받았던 상처가 되살아나 우리 둘은 서러워서 목놓아 울었다. “난, 엄니에게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돌려줄 거야. 지금보다 더 잘나갈 수 있었는데 엄니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잖아.”라며 엉엉 울었다. “너, 그러다가 엄니 돌아가시면 엄청 후회한다. 그러지 마, 금자야!”라며 마음 약하고 겁 많은 언니는 자신의 설움을 거두며 나를 달랬다. “괜찮아, 그때 가서 후회하더라도 엄니한테 꼭 복수할 거야.” 우리는 엄니 성토로 시작해서 복받치는 울음을 토해 내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주며 격한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뭇가지~’처럼 ‘난 그렇게 엄니의 사랑에 목말라했는데, 엄니는 그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기 어려웠나?’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반문했다. 그래서 나는 엄니에게 복수하기로 했다. ‘어떻게?’. 함무라비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다른 방법 있어?’, ‘있지’, ‘뭔데?’, ‘증오의 복수가 아니라 사랑의 복수지’. 나는 엄니에게서 받고 싶었던 대로 엄니에게 되돌려 주는 방법을 택했다.

화개장터에서 나물 사고 나서 엄니와 잠시 쉬고 있는 모습. 벚꽃이 필 무렵인 봄이면 엄니를 모시고 화개장터가 있는 하동에 간다. 숨차고 허리 아프고 다리가 쑤시지만, 장터의 활기가 잠시 엄니의 아픔을 잊게 만든다. 몇 년 전에는 한 해가,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시는 엄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최금자

하루는 엄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엄마, 사랑해!”라고 하자 처음으로 듣는 딸의 사랑 타령에 당황한 엄니는 “미친 ×”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엄마,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왜 전화를 끊어? 내가 수화기를 놓기 전까지는 끊으면 안 돼”. 엄니는 또 “미친 ×”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며 엄니와 나는 기싸움을 했다. 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는 엄니의 말에 “엄마, 전화 요금은 내가 내거든. 엄마가 ‘나도 사랑한다.’라고 해야 통화가 끝나는 거야, 알았어?” 엄니는 전화 요금이 신경 쓰였는지 억지로 “나도 사랑한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런 일이 엄니와 통화를 할 때마다 반복되었고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엄니는 순순히(?) 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신다. 어린 시절 엄니의 살을 부비고 싶었던 ‘피부접촉 결핍 증후군’, 일명 ‘애정 결핍’을 풀기 위해 엄니가 기분 좋을 때 껴안아 주고 볼에 뽀뽀를 한다. 처음에는 나를 밀쳐 내던 엄니가 이제는 순순히 곁을 내주고 얼굴도 내미신다. 마치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엄니의 뽀뽀를 애타게 그리며 뺨을 내밀고 싶었던 대로 말이다.

부모님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명절을 외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경에 약수동 시장에 있는 쌀가게에 나가 장사하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오셨다. 자식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학교 다니게 하는 것도 어려웠던 시절, 하루 삶의 무게가 천근이었을 텐데 자식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리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음을 깨닫기에는 나는 어린아이였다. 내가 중년이 되고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모님이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꿈을 포기하셨음을, 그분들이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시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엄니가 얼마나 고달픈 일생을 사셨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니를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고 엄니의 성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89살 생신을 맞으신 엄니에게 뽀뽀 선물을 하는 모습. 엄니는 우리가 사는 본죽리 시골집을 유배지라 하시면서도 이곳에 자주 오신다. 푸성귀가 풍부한 봄과 여름은 채소를 좋아하는 엄니가 선호하는 방문 시기다. 척추협착증으로 다리 통증이 심한 엄니가 지팡이를 집고 즐겨 하는 운동이 텃밭 산책이다. ⓒ최금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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