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이단” 없는 교회

(마이론 페레이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에 아마존지역 주교시노드를 주재할 예정인데, 이 모임은 그가 지금까지 소집한 가장 중요한 모임 가운데 하나다.

2018년 6월에 배포된 의안집에는 이 시노드의 세 가지 핵심 주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회 안 여성의 역할, 원주민의 권리와 전통, 성체성사를 더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해 줄 필요.

이 가운데 맨 마지막 주제는 두 가지 큰 쇄신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즉 기혼 남성의 사제 서품 문제, 그리고 성체성사와 관련된 요건들의 조정 문제다.

왜 이 두 가지 요구가 떠올랐는가? 아마존 지역은 밀림 깊숙한 오지 주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제가 부족하다.

브라질의 클라우지우 우메스 추기경은 이 문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마존에는 이식된 유럽식 교회보다는 원주민의 얼굴을 지닌 교회가 필요하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원주민 성직자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원주민 교회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성체성사에 흔히 쓰이는 밀가루 떡은 습기가 많은 아마존에는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이번 시노드에서는 아마존에서 나는 유카로 만든 떡을 허용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사목적 필요가 있으면 기꺼이 변화를 주려고 하는 교황이 있다. 이런 모습은 5년 전 로마에서 열렸던 가정에 관한 제1차 주교시노드 맨 첫머리부터 보였다.

그 시노드는 이전의 시노드들과 전혀 달랐다. 두 가지 중요한 이유에서다. 첫째는 주교들은 가톨릭 가정,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가톨릭 가정이 직면한 문제들을 토의 주제로 삼았는데, 이는 시노드가 열리기 적어도 6달 전에 전 세계 교회에 회람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했다. 이전의 시노드들은 대부분 (사목 문제가 아닌) 교의적 문제들을 다뤘다.

이 설문조사에 따라 전에는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는 전혀 거론되지 않던 주제들이 다뤄졌다. 이혼한 신자들의 영성체 문제, 인공 피임과 신자들, 대체 생활양식으로 대두된 동성애 문제.

그리고 (인도와 같은) 남아시아의 상황에서는 종교간 혼인이 늘어나는 문제, 박해받는 가톨릭 신자 가정과 연대하는 문제가 제기됐었는데, 특히 (불가촉천민인) 달리트와 소수부족민이 많은 곳에서 그랬다.

이 시노드에서 정리됐던 임시 보고서는 전 세계 교구에 회람됐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각 교구와 신자들이 이 문서를 연구하고 토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을 보고 나는 그 다음 지점에 생각이 미쳤다. 즉 토론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2013년 2월 13일 상파울루에서 모인 클라우지우 우메스 추기경(왼쪽)과 오질루 페드루 셰레르 추기경. (사진 출처 = UCANEWS)

‘말하라!’

이전의 시노드들에서는 대의원으로 참석한 주교와 추기경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준비된 보고서를 건네는 것은 교황이었다.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토론하도록 아무도 허용받지 않았다. 그게 관례였다.

하지만 이제는 변했다. 프란치스코 교항은 누구나, 즉 주교, 사제, 평신도 모두가 “크게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모두가 참여하는 교회를 원한다. 이러한 교회는 너무나 놀랍도록 새로운 것이라서 우리가 여기에 익숙해지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전에는 교회 권위가 내놓은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어떤 의문도 제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교회 권위는 교황일 수도 있고 우리네 본당신부일 수도 있다. 근래 최악의 시기는 요한 바오로 2세 시절이었다. 그는 교회 지침과 교의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주교들과 신학자들을 검열했다.

달리 말하자면, 가톨릭의 종교적 양성은 원래는 자유로운 질문과 비판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그저 교의를 주입하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는 자유를 억누르는 (가톨릭 바깥의) 다른 양성 과정과 마찬가지였다.

오래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를 묘사한 한 가지 방식은 교회는 “순례하는 백성”이라는 것이었다. 이 표현에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커다란 순례자 무리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시노드”(synod)라는 단어에는 이런 뜻이 있다. 함께 걷는 사람들. 그리고 또 다른 용어인 “동반”(accompaniment)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즐거움과 시련을 나누며 그리하여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인도 식으로 말하자면 “samanvaya”가 된다.

공동합의성(synodality/samanvaya)은 나와 다른 상대에 맞추고, 나와 다른 이의 보조,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에 맞춘다는 뜻이다. 이렇게 대화를 하는 곳에는 더 이상 이단이라는 것이 없다. 다른 여러 점뿐 아니라 이 점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안에 새로운 대화 스타일을 만들었다.

(마이론 페레이라 신부는 예수회 사제이며 인도 뭄바이에서 미디어 컨설턴트를 하고 있다. 이 글에 실린 관점이나 의견은 필자의 것이며, <아시아가톨릭뉴스>의 편집진의 공식 입장을 언제나 반영하지는 않는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synodality-means-walking-together/86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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