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존 니프시, 분도출판사, 2019

이 책의 저자인 존 니프시는 임상심리학자이자 신학자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명’에 관한 이야기다. 소명이라는 단어는 사람마다 다른 연상과 이미지를 불러온다. 대개 사람들은 소명이라고 하면 수도자나 성직자들의 소명만을 떠올리거나 직업적 의미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지엽적이며 협소한 의미다. 소명은 가정, 연애, 일상적 취미나 관심의 영역, 정치적, 사회적 문제 등 삶의 모든 차원을 통틀어 우리가 시간과 자원을 들여 하는 모든 것에 해당되며 이는 소명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소명을 뜻하는 영어 ‘vocation’은 라틴어 ‘vocare’(부르다)와 ‘vox’(목소리)에서 왔다. 저자는 소명의 의미를 영성적 의미와 심리학적 의미로 구분한다. 영성적 의미로 소명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심리학적 의미로는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근원적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듣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한 방향을 향해 있다.

전통적 심리학자들과 달리 영적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칼 융은 소명의식을 인간의 깊고 무의식적이고 내적 자기에서 비롯되는 자기실현의 욕구로 이해했다. 그는 소명의 목소리를 우리의 가장 깊은 자기 혹은 양심의 목소리로 여겼으며, 이 가장 깊은 자기는 심리학적으로 하느님께 상응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자기는 평생 동안의 자기발견과 자기실현 과정 –융은 이를 개성화라 불렀다–에서 우리를 부르고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로 기능한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기도와 명상 수행은 영의 내적 목소리를 더욱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듣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심리학적 차원에서 기도는 내적 자기와 대화하거나 연결하기 위하여, 내면에서 오는 메시지를 경청하기 위하여 내적 경험에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저자는 목소리는 우리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목소리는 타인을 통해 우리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존중하며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는 필자역시 무척 공감하는 이야기다.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존 니프시, (정경일), 분도출판사, 2019. (표지 제공 = 분도출판사)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목소리를 기도하는 내적 고요 속에서도 들을 수 있지만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들 안에서도 들을 수 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달하시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기도를 통해 그분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깨어 있을 때는 내안의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많은 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분을 경험하곤 했었다.

영적 식별, 즉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거짓자아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내적으로 ‘올바름’의 느낌을 직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 길이 우리에게 맞는 것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건강함을 느낀다. 하느님 중심의 성향은 우리를 하느님, 타인, 우리 자신과 더 깊고 참되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주는 욕망이다. 반대로 거짓자아 즉 자아 중심적 성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영은 내면의 어둠 또는 황폐함을 느낀다. 이 성향은 우리를 점점 자아 중심적으로 이끌고 하느님과 타인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이기적이고 자기 과시적이고 자기 보호적 감정과 생각의 방식인 자아 중심적 성향은 진정한 자기의 더 깊은 리듬이나 갈망 그리고 하느님의 부름에 부합하지 않는 삶의 방향으로 우리를 기울게 한다.

진정성의 소명은 심리적 정직성을 요구한다. 우리의 그림자 측면을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자신과 타인을 판단할 수 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충동적 행동도 위험하지만 반대로 우리 자신의 그림자 측면을 부인하거나 억압할 때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우리의 내적 실재에 대한 방어적 부인은 심리적 정직함의 결핍을 나타낸다. 거짓과 부인에 근거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거짓자아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너무 방어적이고, 자신을 너무 억제하려 들고, 항상 너무 척하려고 하면 진정한 감정들과 그 감정이 품은 생명력에서 단절된다. 그리고 우리의 분노와 성적 열정과 단절될 때 진정한 감정적, 영적 열정 또한 차단될 수 있다.

소명에 따르는 삶에는 성장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고 우리 모두에게는 변화를 원치 않는 자기중심적 성향이 있어서 미지의 세계로 부르는 목소리를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우리가 잘 아는 익숙한 세계에 머무르려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것,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갈 때 상처 입거나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격을 갖는 소명은 지속적 성장과 변화를 위한 헌신을 요구한다. 이는 자신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적, 영적 고통과 불안을 기꺼이 견디는 것이다. 우리가 참모습에 맞지 않게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아프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경험하는 신체적 또는 감정적 고통의 증상은 도움을 호소하는 영혼의 경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토마스 무어는 "영혼의 돌봄"에서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우리가 잘못에 빠지거나 참모습에 맞지 않게 살 때 내면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통스럽거나 파괴적 증상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삶이 표면적으로는 만족스러워 보이더라도, 영혼은 지속적 근심, 체한 것 같은 답답함, 떨쳐 버릴 수 없는 우울증, 끊임없는 불안과 공허감, 일에 대한 권태감과 소진감, 끈질긴 영적 불안과 내적 공허감을 통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도 깊은 영적 욕망이 무시되거나 경시될 때 우리는 아프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증상에 대한 가장 좋은 태도는 고통스런 감정이 가르쳐 주거나 말하려는 것을 알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것, 당황하지 않는 것, 끈기 있고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심지어 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신경증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대신 그것이 의미하는 것, 가르쳐 주는 것, 목적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심지어 신경증에게 감사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또 소명은 단순히 자신의 완성뿐 아니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로서의 길로 들어서게도 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개인들을 치유하는 사적 영역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영역으로 치유의 소명을 확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상처 입은 치유자가 타인을 돕기 위해 자기 고통을 이용하는 것과 고통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는 보통 고통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지혜롭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단정적 생각들이 오히려 고통에 대한 자각을 상투적으로 만들며 고통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영적인 것으로 미화시킬 위험을 갖는다. 고통은 낭만적이거나 그저 영적인 것만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 개인이 선택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고통은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도 있고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만들 수도 있다. 고통이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아닌지 결정짓는 한 가지 요소는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샌 포드는 “고통은 그 자체로 치유가 아니다. 고통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질 때만 고통은 치유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문제의 특정한 형태, 예를 들어 질병, 부상, 우울증, 가난, 박해 등도 아니고 그것과 관련된 고통의 정도도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삶이 주는 어려움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그 문제가 어떻게 경험되는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문제를 성장을 위한 의미 있는 기회로 느끼는가 아니면 피해야 할 무의미한 장애물로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올바른’ 태도는 고통의 의미를 식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의미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의 영적 의미를 보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올바른 영적 태도를 찾는 것은 우리가 그 상황을 복으로 경험할지 저주로 경험할지를 결정한다. 우리가 고통스런 문제와 씨름할 때 복을 발견하는 것은 그 문제에 들어 있는 영적 의미나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고통으로 ‘변장한 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겪는 유혹은 고통이 주는 메시지를 ‘얻기’ 전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배우기 전에 조급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의 고통과 연결시켜 주고 연민을 공유하게 한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우리에게 연민을 느끼고 우리는 고통받는 하느님에게 연민을 느낀다. 우리는 고통받는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 사적, 내적 관상에서 사회적 고통의 세계로, 고통받는 인간 가운데 있는 하느님에게로 나아간다. 우리는 고통 겪는 이들의 외침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연대하면서, 그들을 도우려 애쓰면서,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한다.

필자는 얼마 전 다시 읽은 전태일 평전에서도 이와 같은 개인의 소명의식이 사회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생히 보았다. 자신의 고통에서 출발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고통에로의 연대와 양심의 목소리가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 어떤 씨앗을 뿌리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진정성과 양심 안에서 ‘참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온전히 투신한다. 전태일이 자신을 다 바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이야말로 거룩한 소명의 근간이 되며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다. 오직 사랑의 완성만이 있을 뿐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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