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자칫 우리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교종,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식별의 기준들 제시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1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 사도행전 교리교육에서 성경에서 보여 주는 사도들의 용기는 성령에서 오며 그 용기가 오늘날의 순교자들을 지탱해 준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종의 가르침 주제는 식별의 은총, 곧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발걸음을 볼 수 있도록 성령의 음성을 듣는 능력에 관해서였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도행전 교리교육을 계속합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을 가로막는 유다인들에게 베드로와 사도들은 세상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수 없다고 용기 있게 대답합니다. 이처럼 열두 사도들은 모든 사람을 일깨우려는 ‘믿음의 순종’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로마 1,5 참조) 실제 그들은 오순절부터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게 한 특별한 시너지 효과를 경험합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우리와 성령’(사도 5,32) 혹은 ‘성령과 우리’(사도 15,28)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들은 단지 ‘나‘라고만 말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계약에 힘입어 사도들은 누구로부터도 위협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상적인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들이 겁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쟁이에서 용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길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을 위해 많은 싸움을 이겨 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시대 순교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대담한 증인들로서 앞으로 걸어가는 데 뒷걸음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어 놓으며,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4년 전 리비아 해변에서 참수당한 이집트 콥트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노동자였음에도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예수님, 예수님”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을 팔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순교자들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분이 구원을 주는 말씀을 즉각 지체 없이 전하라고 보내신 성령의 ’확성기‘입니다.

실제로 이 결단은 유다인들의 종교체계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위협을 느낀 유다인들은 폭력과 사형으로 응수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항상 똑같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최고의회에서 동료들 반응을 저지하며 다른 의견을 낸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이며, 신중한 사람인 가말리엘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받았습니다.(사도 22,3 참조) 그는 발언권을 얻어 평소 패턴을 벗어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식별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가말리엘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몇몇 사람을 언급하면서,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계획은 처음엔 호응을 얻지만 나중에는 흐지부지되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위에서 오는 모든 것들과 하느님의 ‘서명’을 지니고 있는 것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계획들은 항상 실패로 끝나며, 우리들처럼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정치적 계획들을 보십시오. 모든 국가에서 보는 것처럼 계획들이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어떻게 바뀌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제국들과 지난 세기 독재정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스스로 매우 강하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무너졌습니다. 또 오늘날 제국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그들은 무너질 것입니다. 사람의 힘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힘만이 지속적입니다.

많은 죄와 스캔들과 나쁜 일들이 있었던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 역사와 교회역사를 생각해 봅시다. 왜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며, 자주 스캔들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 그들은 나중에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상 구원하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가말리엘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몇몇 사람들을 가리켜 사람에게서 나온 계획들은 처음엔 호응을 얻지만 나중에는 흐지부지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추종자들이 사기꾼을 믿었다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겠지만 만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들과 싸움을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9)라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그는 우리에게 식별력을 가르쳐줍니다. 이 말은 새로운 빛으로 그리스도인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하고, 복음을 아는 기준을 제시하는 평온하고 현명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7,16 참조) 이는 마음을 건드리며, 원하는 효과를 얻게 하는 말입니다. 최고회의의 구성원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사도들을 죽이려던 계획을 포기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식별하는 습관을 갖출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길 청합시다. 우리 시대와 우리 주변 사람들 모습 안에서 걸어가시는 하느님의 표징을 통해 구원역사의 통일성을 항상 볼 수 있도록 성령께 기도합시다. 왜냐하면 시간과 인간들의 얼굴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메신저들이기 때문입니다.

 

“연민은 우리를 참된 정의로 이끕니다”

교종, 9월17일 산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여름 휴식기간 중단했던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가 9월16일부터 재개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17일 미사강론을 통해 ‘연민’은 현실 차원을 깨닫게 해 주는 ‘마음의 안경’이며 하느님의 언어라면서 반면 많은 경우 인간의 언어는 ‘무관심’이라고 말했다. 

강론 내용.

연민(동정심, 가엾은 마음)에 마음을 열고 무관심으로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사실 연민은 우리 스스로 갇히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참된 정의’의 길로 이끕니다. 오늘 복음(루카 7,11-17)은 예수님께서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덤으로 향하던 나인 고을 과부를 만나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냥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엄청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연민에 사로잡히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을 따랐던 군중이 있었고 그 여인을 동행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현실을 직시하셨습니다. 그녀는 홀로 남았고 과부였으며, 외아들을 잃었던 사람입니다. 연민이야말로 현실을 깊이 깨닫게 해 줍니다. 연민은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게 해 줍니다. 연민은 ‘마음의 안경’ 같은 것입니다. 현실차원을 정말로 깨닫게 해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차례 연민에 사로잡히십니다.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연민은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모세에게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다”(탈출 3,7)고 말씀하신 하느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백성을 구원하라고 모세를 파견하신 것도 하느님의 연민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이시고 말하자면 연민은 하느님의 약함이지만 동시에 그분의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성자를 파견하도록 그분을 움직이게 한 것도 바로 연민입니다.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연민은 예를 들어 길에서 개 한 마리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며, “불쌍한 것, 우리 마음이 약간 아프네”라고 느끼는 그런 종류의 고통의 감정이 아닙니다. 연민은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가십니다.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였던 군중을 해산하려 하자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며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대답하신 것을 보면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셨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힘든 하루를 보낸 다음 빵을 사러 마을에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아 보였기 때문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참조)고 복음은 말합니다. 한편에는 연민을 가진 예수님의 태도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해결책을 찾는 제자들의 이기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연민이 하느님의 언어라면 인간의 언어는 많은 경우 무관심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거기까지만 책임지고 더 이상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겁니다. 지금 바티칸 자선소에 걸려 있는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나온 사진들 중 하나는 ‘무관심’이라고 불리는 사진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겨울 밤, 화려한 고급 레스토랑 앞에 한 여성 노숙자가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잘 차려입은 부인에게 손을 내밀자 그 부인이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그 사진을 한 번 보러 가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무관심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다른 위치에서 상대방을 바라봅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연민에 문을 닫아 겁니다. 양심성찰해 봅시다. 나는 습관적으로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성령께서 연민의 거리로 나를 이끄시도록 맡겨 드리는가? 연민은 하느님의 덕목입니다.

돌려주는 것이 무관심에서 우리를 구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의 어머니에게 “울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민의 어루만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신 것입니다.(루카 7,15참조) 이것이 ‘정의’의 실천입니다. 이 단어는 법조계에서 사용됩니다. 곧 ‘돌려주는 것’입니다. 연민은 우리를 참된 정의의 길로 이끕니다. 어떤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항상 권리를 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이기주의, 무관심, 우리 스스로 갇히는 것에서 우리를 구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 미사를 이어 갑시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가엾은 마음이 들도록 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알츠하이머로 고통받는 이들 기억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날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말미에 9월21일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을 앞두고 알츠하이머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가족, 환자를 보살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알츠하이머는 ‘폭력과 학대로 존엄을 짓밟힌 희생자가 된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질병’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의 회심을 위해, 알츠하이머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들의 가족과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교종은 암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기억하면서 이 질병의 예방과 치료가 점점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2018년 세계 알츠하이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약 5000만 명이 다양한 유형의 치매로 고통받고 있다. 이 가운데 3분의 2가 알츠하이머로 환자로 알려져 있다.

 

바르톨로메오 1세 정교회 세계총대주교와 만남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17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정교회 바르톨로메오 1세 세계총대주교를 만나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바티칸 공보실은 프란치스코 교종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르톨로메오 1세 총대주교의 만남은 형제적 분위기에서 진행됐다고 밝혔다. 바르톨로메오 1세는 교종과의 만남에 앞서 제31차 추기경평의회 회의에서 인사했다. 총대주교는 이 자리에서 동방정교회 내에서 ‘공동합의성’이 갖는 가치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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