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많은 이의 불행에 무관심할 수 없다”

교종, 9월29일 세계이민의 날 주일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9일 연중 제26주일이자 ‘제105차 세계 이민의 날’을 맞아 성 베드로 광장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은 특히 이민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여러 가지 언어로 독서와 기도를 바치면서 전 세계가 하나임을 드러내는 가운데 봉헌된 형형색색 활기가 넘친 특별한 전례였다. 교종은 강론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버림받은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 10,18) 신명기에서 볼 수 있는 고아, 과부, 이방인에 관한 표현(신명 24,17; 27,19 참조)은 탈출기에서 반복되고(탈출 22,23), 오늘 화답송에도 나타납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거처에 계시다.”(시편 68,6) 가장 힘없는 계층은 종종 잊혀지고 횡포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특별히 배려하십니다. 그분의 특별한 대우와 관심은 당신 백성에 속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를 위한 윤리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05차 세계 이민의 날 담화에서 “단지 이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라는 주제가 후렴구처럼 되풀이됩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의 문제만 아니라 쓰고 버리는 문화의 희생자인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포함하여 삶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아무도 소외시키지 말고 누구도 배척하지 말며, 우리의 인류애와 더불어 그들의 인류애를 재건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아직도 불의가 많습니다. 사랑의 행동과 함께 소외를 낳는 불의, 특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에게 손해를 끼치는 소수계층 특권들에 대한 성찰도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 세계에서는 엘리트 의식이 점점 높아지면서 배척받는 이들을 향한 잔인함도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극소수 시장의 이익을 위해 개발도상국의 뛰어난 천연 자원과 인적 자원은 지속적으로 고갈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세계 일부 지역에만 해당됩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무기를 제작 판매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분쟁으로 양산된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꺼려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은 늘 작은이들, 가난한 이들, 가장 힘없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식탁에 앉지 못하고 잔치 식탁의 ‘부스러기’만 차지할 뿐입니다.(루카 16,19-21 참조) 곤경에 처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쾌락만 추구하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먹고 마시며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이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살아가며 흥청망청 쾌락만 추구하는 이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혹독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때와 지금은 28세기라는 격차가 있지만 이러한 경고가 지금의 현실도 얼마나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지요! 사실 오늘날에도 안락을 추구하는 문화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를 이웃의 울부짖음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무관심으로 이끌 뿐 아니라 ‘무관심의 세계화’로 이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울며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라자로를 대하는 것처럼(루카 16,19-21) 우리도 그렇게 행동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안위를 지나치게 지키려고 함으로써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옛 가난과 새 가난, 가장 어두운 고독, ‘우리 집단’에 속하지 않는 이에 대한 경멸과 범죄의 비극 앞에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무고한 이의 불행 앞에 무감각한 마음으로 냉담할 수 없습니다.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죄악 앞에서 마음을 회심시키는 울음의 은총을 주님께 청합시다.

사랑하는 것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두 가지 계명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정의로운 세상 건설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지상의 재화를 누릴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세상, 모두에게 기본권과 존엄이 보장되는 세상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자매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하며, 세상 도처에서 버림받고 학대받는 모든 나그네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가 ‘한 아버지의 자녀’인 형제들이 모인 인간 가족의 건설에 책임을 다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세상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그들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 주는 이들,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길의 성모님’, 수많은 ‘고통스러운 길의 성모님’의 모성애에 맡겨 드립시다.

 

“이민자들은 이탈리아 교회에 요구합니다”

주교회의 의장 바세티 추기경, 이민문제 설명

이날 미사 말미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 괄티에로 바세티 추기경은 “세상 도처에서 온 사람들이 전 인류의 아버지이신 주님께 드리는 찬미의 정신으로 하나되어 봉헌한 이날 미사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감사하면서 이탈리아 교회에 요구되는 이민자들의 비극을 설명했다. 그는 “더 부유하고 역량 있는 국가에서 도움을 찾는 문제, 폭력과 기근, 절망으로 고통받는 민족의 대이동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대답은 종종 무관심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사랑의 모범을 통해 불의와 불신앙을 따르지 말고 연대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탈리아 교회는 ‘카리타스’와 ‘미그란테스’를 통해 사랑과 기쁨의 복음을 구체화하고자 노력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성 베드로 광장 이주민 기념비 ‘뜻밖의 천사들’ 축복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날 미사 말미에 제105차 세계 이민의 날을 위해 거행된 오늘 성체성사의 의미는 다양한 부류의 취약한 사람들을 위한 친밀함만이 아닌 교회의 구체적 배려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종은 우리는 전 세계 모든 교구 신자와의 일치 안에서, 오래전부터 거주한 시민이든 새로운 시민이든 누구도 사회에서 배척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 세계 이민의 날을 지낸다며 그 누구도 사회에서 배척되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 삼종기도를 바친 후 ‘환대에 대한 복음의 도전’을 모든 이에게 상기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뜻밖의 천사들’이라는 조각상을 축복했다.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가 만든 ‘뜻밖의 천사들’ 작품 주제는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라는 성서구절을 참조했다. 

이날 교종은 “청동과 점토로 된 이 조각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역사적 시대의 이민자들을 표현합니다. 저는 모든 이가 환대의 복음적 도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예술작품이 성 베드로 광장에 설치되기를 원했습니다.”라고 설명한 뒤 카메룬 출신의 가족이 조각상을 덮고 있는 흰 천을 걷어 냈고, 교종은 그들과 포옹했다. 이어 교종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성 베드로 광장 왼쪽 열주랑 옆에 설치된 조각품을 만져 보면서 축복했다.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진 ‘뜻밖의 천사들’ 조각상은 다양한 문화적, 인종적 배경과 다양한 역사적 시대의 이주민과 난민 그룹을 묘사했다. 조각상 인물들은 도망, 위험, 불확실한 미래의 드라마를 드러낸 얼굴을 하고 있으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 촘촘히 뗏목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 다양한 사람들의 무리 속 중앙에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존재를 암시하는 것처럼, 천사의 날개가 눈에 띄게 나타나 있다.

 

“영적 미지근함은 삶을 무덤으로 바꿉니다”

교종, 9월2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는 내면의 가짜 평화에 만족하는 반쪽짜리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 한다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회심은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제1독서인 하까이 예언서는 어려운 내용의 책이지만 이 책 안에서 주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당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집(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들 태도를 뒤돌아보고 변화시킬 것을 촉구합니다. 하까이 예언자는 패배자로 살고 있는 게으른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애썼습니다. 성전은 원수들에 의해 파괴돼 잔해만 남았지만 주님께서는 성전을 재건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이를 보내실 때까지 백성들은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쓰라렸지만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열심히 하지 맙시다. 아마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맙시다. 그냥 이대로 지냅시다.” 그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자신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려는 주님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드라마입니다. 

우리가 미온적이 되고, 우리의 삶이 미지근해지고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들의 드라마는 우리들의 드라마가 됩니다. “예, 예, 주님, 좋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천천히 하시죠, 주님. 지금 이대로 내버려 두시죠. 내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똑같은 말을 하며 실천을 그 다음 날로 미루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마음의 회심과 삶의 변화에 대한 결정을 미룹니다. 이런 영적 미지근함은 ‘무덤들의 평화’입니다.

미지근함은 종종 불확실성들 안에 숨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다음으로 미루는 태도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내면 안에서 가짜 평화와 평온을 유지함으로써 무가치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는 ‘무덤들의 평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미지근함과 영적으로 미온적 태도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 삶은 무덤으로 바뀝니다. 그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단지 닫힘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 예, 우리는 망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맙시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삶의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변화하길 원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변화하길 바라시는 일이지만 잘되고 있지 않은 사소한 일들을 통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회심을 원하시지만 우리는 “내일 하겠다”고 대답하며 미룹니다.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의 정신, 혹은 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씨앗을 뿌렸지만 적은 수확을 거둔 ‘착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많은 것을 약속한 삶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미지근한 마음에서 깨어나 ‘영적 삶의 달콤한 마취’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주님께 청합시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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