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0월 6일(연중 제27주일) 히브 1,2-3.2,2-4; 2티모 1,6-8.13-14; 루카 17,5-10

이번 주간의 말씀은 신앙의 무상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신앙을 늘이기

복음은 사도들의 청원으로 시작한다. 더 깊은 신앙을 가질 필요를 느끼면서, 사도들은 주님께 대한 신뢰를 늘이고자 한다: “믿음을 더하려는” 것이다.(루카 17,5)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약간 놀랍다. 그분은 사도들의 청원에 직접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신앙의 힘에 대하여 말한다. 특히 작은 시작으로부터, 겨자씨와 같은 신앙으로부터 큰일이 시작된다고 말한다.(17,6) 예수님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적거나 많은 신앙을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강한 신앙을 가지는 것 또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실천함으로써 신앙을 강하게 만든다. 마치 실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믿음으로써 믿는 것을 배운다. 신앙은 실천하지 않고서 독립적으로 늘어날 수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제자 되는 것 이외에 신앙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 오로지 한 길, 예수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이 길을 따르라고 우리는 초대된 것이다. 커져 가는 가난 그리고 사람들의 권리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멸시되고 위협을 받는 가운데에서 이 길을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꽃피는 신앙. (이미지 출처 = Pexels)

참으로 유용한 하인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신앙이 선물이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비교는 꽤 어렵게 보인다. 그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하인은 주인으로부터 특별한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루카 17,7-9) 먼저, 신앙의 결단에 요구되는 것을 따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쓸모없는 하인들”이며, “보잘것없는 노예들”(17,10)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단지 있을 법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취해야 할 태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신앙이 선물이라는 강력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앙을 살고,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는(17,10) 우리의 능력 역시 은총이다. 그러므로, “보잘것없는 노예들”의 “쓸모없음”에 대한 선언은 깊은 결단을 내리고 있는 신앙과 완전히 일치하는 자세다. 신앙의 생활은 항상 선물로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만큼 받는 것이다.

따라서 또한 역설적으로, 참으로 유용한 하인들은 그들이 “보잘것없다”고 분명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보잘것없음”에 대한 강조는 신앙의 무상성을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 바오로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는 박해자로부터 제자가 되는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1티모 1,14) 이 선물을 살고 또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을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위한 작업에 매우 유용한 일꾼들이 된다. 그들은 티모테오서에서 언급된 것처럼(1티모 1,6-7) 사랑의 증언 없이 스승들인 것처럼 과시하는 이들과 극명한 대조가 된다. 그들은 쓸모없으면서도 자신들이 유용하다고, 심지어 절대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비교가 된다. 연대감, 정직성 그리고 진실이 제자들의 속성이 되어야 한다. 생명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히브 2,4)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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