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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아, 나 살려라!

기사승인 2019.10.23  14: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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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8]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사건이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에 대한 진실에 직면하자 삶의 고민을 시작하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떨쳐버리고 질긴 가족의 연도 끊고 출가했다. 나에게도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고 기억되는 어느 날 우리 윗집에서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기심 가득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집으로 달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아주머니는 흰색 옷을 입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 사건과 더불어 내 육신의 잦은 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 버겁다고 느껴졌다.

육신의 병은 나를 또래보다 성숙하게 했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했다. 첫 번째 시련은 기도가 막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사건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입안이 곪았는데 동네병원 의사는 괜찮다며 주사만 놓았다. 며칠 뒤 급기야 곪았던 것이 터져 기도를 막아서 숨을 헐떡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엄니는 사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 약수동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 한 아저씨의 소개로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두 번째 시련은 온몸이 뒤틀리는 증세, 간질이었다. 당시에는 나를 이상하게 여길까 봐 친구들에게 병명을 발설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또래보다 키가 크고 날씬해서 언니는 그런 나를 미스 코리아로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꿨다. 처음에는 그런 언니의 생각을 싫어했는데 차츰 나도 물들었다. 하지만 간질의 후유증이었는지 양다리가 퉁퉁 부으면서 내 첫 번째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미스 코리아가 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그때는 참으로 아쉬웠다. 얼마 전 엄니와 언니에게 나의 간경변-최근 대동맥 파열로 입원했을 때 알게 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내가 어릴 때 간질 증세가 나타나면 엄니와 언니가 사색이 되었다. 어느 날 막내 오빠와 같이 약수동 시장에서 집으로 가던 중 발작이 일어났고 이를 알게 된 엄니가 나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병원 이름이 ‘순화병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빠르게 병원으로 갔고 훌륭한 의사도 만나 증세는 호전되었고 그 뒤에는 발작이 사라졌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신학 관련 공부를 하는 여학생들을 위한 공동체 ‘산타 체칠리아’에 함께 살았던 동료들. 재작년 이른 봄 이탈리아를 갔을 때 사도 바오로의 순교지인 ‘트레 폰타네'(세 개의 우물)를 순례했다. 왼쪽으로부터 로사리아, 로리, 베티 그리고 나. 로리는 내가 병원에서 수술받고 퇴원한 뒤 한 달 정도를 지극정성으로 나를 간호했었다. 김치를 나보다 좋아한 로리의 성화에 못 이겨 한인 식당을 가기도 했다. ⓒ최금자

3남 2녀 중에서 막내인 나는 약골로 태어나 평생 병원 단골이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학교를 결석한 적도 많았다. 내가 자주 아픈 것은 오빠들과 언니가 영양분이 풍부한 엄니 젖을 다 빼 먹고 내게는 맹물만 남겨서 그런 것이라고 항변한다. 병은 한국뿐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공부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난소에 혹이 나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튿날 통증이 한창이었는데 간병인 제도가 없어서 간호사가 내게 일어나 세수하라 했다. 통증 때문에 못 일어난다고 하니까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나 죽어요!’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원하면 병원비가 무료라 일주일 안에 환자를 퇴원시킨다. 퇴원 후 기숙사로 돌아와 한 달 정도 쉬어야 했을 때 나를 간호한 사람은 내가 동생이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인 로리였다. 욕조에 갖다 놓은 의자에 앉아 있으면 로리는 내 머리를 감겨 주고 목욕도 시켜 주었다.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그 시기가 참 서글펐을 거다. 타국에서 그것도 아플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도움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고맙다, 로리야!’

최근에 겪은 큰 병치레는 폐결핵과 대동맥 파열이다. 재작년 여름 결핵 치료를 위해 엄청 독한 약을 먹어야 했을 때 우리 집에 엄니가 계셨다. 나는 엄니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려고 정말 잘 먹었다. 다행히 3개월 복용 뒤 증세는 호전되었고 9개월 뒤에는 완쾌진단을 받았다. 대동맥 파열 때도 엄니는 나와 함께 있었다. 평소 호흡기가 약해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었던 폐결핵과 달리 대동맥 파열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대동맥이 찢어질 수 있단 것을 아파서야 알았다. 올해 5월 30일 목요일 낮 12시경 요가 수업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는데 갑자기 엉덩이 바로 위에서 뭔가가 팍 터지는 통증을 느꼈다. 순간 통증이 여기서 멈추지 않겠다는 직감이 왔고 그것을 신호탄으로 척추를 타고 어깨까지 극한 통증이 올라왔다. 나는 구급차에 실려서 갔고 너무 아파서 엉엉 울었다. 

대동맥 파열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루가 여삼추’라더니 그 긴 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만능재주꾼인 남편 베드로는 음료수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후다닥 독서대를 만들어 줬다. ⓒ최금자

혈압이 올라가면 대동맥 파열이 재발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는 일 년 가까이 다녔던 요가도 끊었다. 이제는 힘을 쓰는 행동, 일, 운동도 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걷기다. 얼마 전 오랜 신장병으로 투석을 거쳐 신장이식 수술까지 받은 지인을 방문했다. 지인은 ‘걸음아, 나 살려라!’는 말이 얼마나 명언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수술 뒤 하루에 20킬로 이상을 걸었더니 합병증도 없고 아직 건장하게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걸음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오전, 오후에 걷기로 했다. 아침에는 남편 베드로와 강아지 쟐로와 함께 산책하고, 오후에는 석양이 지는 것을 보면서 논둑길을 홀로 걷는다.

병은 나에게 평생지기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아니 죽는 순간까지 그 친구는 내 곁에 있을 것이라 여겨 사이좋게 지내려 한다. 그러니 너무 서글퍼 하지도 절망하지도 한탄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심심할까 봐 곁에 있는 친구라 여기고 싶다.

쟐로와 함께 한 아침 산책. 농촌은 만병통치약인 걷기에 참 좋다. 논둑길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가 가장 보기 좋다. 비닐하우스 창고에서 나는 퇴비 냄새가 옥에 티지만. ⓒ최금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최금자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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