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새사제 조성근 신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 노력했고 세상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논리라고 믿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가끔 마더 테레사와 같은 희생적 인물을 텔레비전에서 볼 때면 “틀림없이 어떤 이득이 있을 것”이라며 일방적 희생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지난 9월 사제품을 받았다.

세상의 성공, 그 뒤의 고통 그리고 늦게 만난 신앙 속 여정 끝에 50살에 갓 새사제가 된 그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조성근 제노비오 신부다.

조성근 신부의 소식을 듣고, 한참 늦은 그의 나이가 조금 놀라웠지만, 어떤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만났다. 조 신부는 세례를 받은 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이야기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들려줬다.

도피처에서 만난 신앙과 새로운 삶

“공부를 열심히 해 봤는데 성적이 안 나오니, 공부는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고등학교도 어머니 덕분에 간신히 졸업했다”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 세상의 논리를 믿었고 그에 충실한 덕분에 그는 30대 전에 이미 풍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됐다. IMF가 닥치기 전까지는.

사업이 어려워졌고, 많은 금전 문제를 겪게 됐지만 그에게는 해결할 의지가 있었다. 사업에 관련된 이들과 가족들의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고, 덕분에 어려운 상황을 극복했다.

그러나 괜찮은 것은 그의 일과 주변 사람들뿐이었다. 홀로 무리했던 날들은 모르는 새 그의 내면을 무너뜨렸고, 죽음까지 생각하게 됐다.

고통의 시간 중에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면, 성당에 나갔으면 좋겠다”는 불교도였던 어머니의 오랜 당부를 기억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숨듯이 찾아든 곳에서 마침 그는 성경을 아주 열심히 읽던 한 사람을 만났고, 몇 달이 지난 뒤, 불쑥 나타난 그 사람은 “갈 곳이 있다”며 조 신부를 성당으로 이끌었다.

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날카롭고 권위적인 성격의 30대 초반 남자. 당시의 조 신부를 기억하는 이들의 말이다. 그는 처음으로 참례한 미사에서 누군가의 안내로 맨 앞자리에 앉았고, 낯선 자신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는 이들이 천사로 보일 만큼 감화를 받았다. 그 다음 날로 새벽미사에 다니기 시작했고, 레지오와 청년성서모임에 등록하고 이전에 했던 모든 일을 중단했다.

스스로 “중간이 없는 사람”이라는 그는 “그때 그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며, “새로운 삶에 대한 갈증이 컸다. 그리고 그 갈증은 신앙 안에서 비로소 해소 됐다”고 말했다.

칠레 주민들이 보낸 제의를 입은 조성근 신부. 그는 이 사진만은 꼭 하나 찍어서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사진을 청했다. ⓒ정현진 기자

"하느님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원망 그리고 "잘 지내고 있느나"는 물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도회 입회에 대한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동시에 결혼하고 싶은 한 사람도 만나게 됐다. 성가정에 대한 꿈을 먼저 선택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가치관 차이는 이별로 이어졌다. 낙담한 그는 한국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고, 얼마 뒤 그는 평신도 선교사로 칠레에 도착했다.

선교사로서의 삶도 녹록치는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너무 척박하고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 특히 범죄와 폭력, 가난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원망 어린 생각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나온 길이었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라도 버텨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노동을 시작했다. 근처 땅을 일구며 쉬지 않고 일하는 중에도 주민들은 말과 먹을 것을 건넸다. 공소에 꽃밭을 만들던 그에게 어떤 이는 꽃을 건네며 자기 집에도 꽃을 심어 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가꾼 공소 화단에서 1년 뒤 꽃이 피었어요. 어느 날 그 옆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렸어요. ‘잘 지내고 있니?’라는 말이요. 그날 저녁 펑펑 울었어요. 나는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은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굶는 아이들, 총에 맞아 죽는 아이들, 나에게 말을 건 동네 주민들, 공소의 꽃으로도 그분은 내 곁에 계셨다는 걸.”

이제 나에게 세상은 하느님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곳
하느님 냄새 나는 사제이자 선교사로, 그들과 기쁘게 살고자 합니다

“너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야. 네가 옆에 있어서 좋지만 나는 너에게 (고백) 성사를 받고 싶어. 사제가 되어 줄 수는 없겠니?”

선교지에서 만난 한 친구는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친구의 말에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한 번 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2012년 골롬반회에 입회한 뒤, 서울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한다. 세례를 받은 지 꼬박 10년 만이었다.

그는 신학교 입학은 그저 한 줄로 쓰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마치 기적이나 마법처럼 이뤄진 일 같다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이 이뤄진 섭리”라고 말했다.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보라고 말해요.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갈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삶을 되돌아 묵상할수록 이 길로 그분이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끝까지 남을 수 있었어요. 아마 30살만 되었어도 나는 이 길을 결코 걷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친구가 나에게 원했던 ‘성사’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요.”

어머니 덕으로 졸업했다는 고교 시절까지의 삶, 사업가로서 성공했던 제2막, 그리고 신앙을 만나 선교사제가 되기까지의 삶은 마치 옴니버스 드라마와 같았다. 그 삶의 여정에 대해 그는 “하느님은 가장 맞는 때에 내가 가장 원하던 것을 들어주셨다”고 고백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살던 나는 이제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 살고자 한다”는 그가 보던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상은 이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상이다.

선교회 후원미사에 함께한 조성근 신부. (사진 제공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이제 선교사제가 된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그리고 있을까?

“교황님은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한국의 사제인 나는 하느님 냄새가 더 많이 나는 사제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물론, 사제이기 때문에 선교지에서도 행동의 제약은 더 많아졌지요. 그 점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이 길을 갈 것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여기에 내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렵기도 하지만, 그는 꼭 처음 선교사로 갔던 칠레에 다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웃음기를 놓지 않았던 그는 칠레를 떠올리면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칠레에서 만난 이들과 연락을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사진을 걸어 두고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가난한 그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제의를 선물했다는 이야기였다.

기쁘고 행복하고자 한다는 조성근 신부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때 그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해나갈 선교 역시 기쁘고 즐거운 가운데 이뤄지기를 바란다. 자신이 기쁘고 즐거워야 함께하는 이들 역시 그 모습을 볼 것이고 서로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다. 굳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신앙 안에서 위기를 겪을 수 있지만 그 또한 과정일 뿐, 하느님이 자신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의 결과는 아니라는 그는, “나는 다만 최선을 다할 뿐, 어떤 결과를 정하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나의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칠레에서 만난 이들이 나에게 하느님을 보여 줬듯이,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나를 통해 다시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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