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 9]

아침이면 그날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날 묵상 중에 올해 2월 말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이제 우울증을 훨훨 털어 버리고 기쁘게 살라고 말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문득 용을 그렸다. 그런데 내 그림 실력은 졸라맨 수준이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용이 아니라 도마뱀이었다. 베드로에게 그림을 보여 주며 “뭘로 보여? 도마뱀같이 보이지?”라고 묻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용이네.”라며 나를 위로한다. 내가 그린 용을 보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화룡점정의 심정으로 심리상담을 받고 싶었다.

오랜 친구인 상담을 전공한 수녀에게 내 우울증 경과와 종결에 대해 상담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서 상담에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니 자신이 참여한 상담프로그램을 지도한 전직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그분과 통화하면서 50분 상담에 00만 원이라고 해서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상담료를 낮추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자 그러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내 수준에서는 좀 비쌌지만 그분에게 상담을 받기로 했다. 상담을 받기로 한 날 아침에 문자가 왔다. “몸이 아파서 오늘 상담은 취소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순간 이 상담사와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문자를 받고 다시 약속을 잡을 것인가 망설이다가 연락을 했다. 그런데 내가 선호하지 않는 요일을 말했음에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결국 그분이 원하는 날짜로 상담을 결정했다. 

2011년 부모님을 모시고 언니와 함께 수덕사를 다녀왔다. 언니와 함께한 기분 좋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아버지 생전에 두 분 모시고 여행 갔다 와서 좋았다. 사진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 그립다. ⓒ최금자

첫 단추부터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날 상담소에 들어서자 어느 방이 상담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문 어디에도 팻말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길래 인사를 했고 그가 바로 그 상담사였다. 시계를 앞에 놓고 상담이 시작되었고 나의 어린 시절에 엄니로부터 받은 상처, 나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첫 상담을 받고 개운한 느낌이 없었다. 상담사는 다음 날짜를 잡자고 했지만 좀 더 생각해 보고 연락하겠다고 하며 상담소를 나왔다. 성신여대에서 삼선교까지 걸어오면서 우울증에 대한 정리는 상담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화룡점정’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엄니와 화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어린 시절 엄니와의 관계로 인해 시작된 내면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어서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다. 엄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드러내다가 ‘혹시 엄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은 아닌지?’, ‘내 개인사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내 상처가 덧나서 더 힘든 것은 아닌지?’ 등등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내 삶을, 내 아픈 상처를, 엄니의 삶과 성격을 객관적으로 볼 좋은 기회를 얻었다. 부모와의 관계로 인해 나와 비슷한 같은 상태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들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위로도 받았다.

2012년 더운 여름, 엄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여수박람회를 관람했다. 박람회의 화려한 색감을 배경으로 부모님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참 좋았다. 1박2일 여수 시내에 묵으며 여수 수산시장에도 들러 싱싱한 물고기를 구경하고 말린 생선도 샀다. 그때에는 엄니가 펄펄 날듯이 걸었는데 지금은 숨도 차고 다리가 결려서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셔야 한다. ⓒ최금자

우울증을 내 다름대로 분석해 보니 여러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 원인은 어린 시절 엄니로부터 받은 상처다. 어린 나이여서 무방비로 상처에 노출되었고 엄니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불완전한 인간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는 17년간 쉬지 않고 나 자신을 혹사한 결과로 탈진 상태에 이른 것이다. 공부와 이어진 직장 일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영적 한계에 부딪혔다. 이를 내버려 두면서 살다가 우울증을 앓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살레시오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나를 많이 도와주신 쟈네토 교수님의 충고,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계명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은 엘리사벳(큘라)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를 평생 기억하면서 살려고 한다. 세 번째는 내가 나에게 부과한 너무 높은 기대치였다. 나에 대한 높은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우울증이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현재에 충실하고 실수를 받아들이고 지질한 모습을 인정하고 내일을 염려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는 한 후배와의 대화 중에 “울 강아지와 아침 산책을 하는데, 쟐로를 쓰다듬는 사진을 베드로가 찍었어. 그런데 내 등이 굽어 허리를 굽힌 내 모습이 마치 파충류 같더라고. 인류의 진화과정을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살고 있는 내가 너무 싫다. 하지만 그게 에누리 없는 내 현재의 모습인 것을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에게 우울증은 심리적 암이다. 우울증에서 벗어났다고 방심하면 다시 발병하는 중독 증세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 중이다. 다시 우울증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혼자서는 어려워서 필요하면 이웃의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동안 나의 아픈 삶을 <지금여기> 지면을 통해 나눌 수 있어서 참 고마웠다. 앞으로 힘들 때마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려 한다.

2019년 3월 구례 산수유 마을에서 엄니는 혼자 걷는 것도 버거워 하셨다. 최근 매년 동안 하동 화개장터로 나물 사러 간다는 명목으로 엄니와 함께 하루 여행을 떠났다. 유난히 장터를 좋아하시는 엄니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약해지셔서 앞으로 화개장터에 갈 수 없다. 그런 엄니를 보면 매우 안타깝다. 그래도 엄니가 내 곁에 계셔서 다행이고 큰 힘이 된다. ⓒ최금자
오늘로 최금자 씨의 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큘라, 엄니와 화해하다'로 50대의 회고와 성찰로 어릴적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최금자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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