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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은 산 자들의 성월

기사승인 2019.11.07  16: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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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11월 10일(연중 제32주일) 2마카 7,1-2.9-14; 2테살 2,16-3,5; 루카 20,27-38 또는 20,27.34-38

신약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영향력 있는 사제나 상인 등 대개 부유gks 귀족적 지도층 사람들이었다. 바리사이가 평신도와 회당을 대표했다면, 사두가이는 성직자와 성전을 대표했다. 대사제들이나 가장 세력 있는 사제들은 주로 사두가이들이었으며, 이들의 주된 임무는 성전을 책임 맡거나 제사의식을 거행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때문이었는지 예루살렘이 무너진 70년 이후 사두가이들은 성전과 함께 급속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한 정경으로 인정해서 신앙이나 관습을 지키는 데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바리사이들처럼 구전 율법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서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런 태도 때문에 후기 유다이즘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천사나 악마와 같은 영의 존재, 부활이나 영혼의 불멸성, 현재의 삶에 대한 사후 보상과 같은 사상들을 배척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로마의 비호하에 특권적 지위와 부를 누리고 있어서 기존 체제가 위협당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그러니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사두가이들 역시 예수로 인해 불기 시작한 새로운 바람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들이 바리사이 못지않게 틈만 나면 예수를 노리고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 사두가이들이 예수에게 던진 우문은 현답으로 돌아왔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모세의 가르침을 들고 나타났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일곱 형제와 한 명의 아내가 사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예수는 모세의 법이 틀렸다 하지 않고, 그 법이 무엇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지를 상기시켰다. 가장 압권은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루카 20,38)이라는 말로 부활이 사람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하느님에 의해 그러하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불붙는 떨기나무‘도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재형이며,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도 살아 있는 현재형이다. 하느님의 불은 인간의 생각처럼 떨기나무를 잿더미로 만들지 않으며,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역시 죽게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모세는 다만 그 ’현재‘ 앞에서 압도된 한 사람으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영원하다는 것과 부활의 의미는 ’현재 살아 있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은 지금 우리와 함께 이 현재를 영원히 살아가는 분이시다. 하느님 편에서 ’때‘는 단절되거나 일시적이거나 잿더미가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이들의 삶을 자신의 현존과 함께 살아 있게 하며, 그에게 맡겨진 희망은 무시간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니 사두가이의 질문은 애초에 신을 모르거나 죽은 신을 전제한 데서 온 것임이 틀림없다.

이렇듯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죽음을 전제해서 판단된 ’현재‘의 부정이었다. 이들은 특권적 지위와 현세적 재물을 신과 성전, 제사직과 율법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다. 직위를 통해 얻는 부와 권세가 곧 신의 축복이요, 그들 방식의 ’신 존재 증명‘이었던 셈이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대면한 신을 알기 위해선 신발을 벗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성전을 사수한다는 명분은 내세웠지만 정작 모세의 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신은 모두 잃어버렸다. 하느님의 현재를 부정하면서 창조와 해방의 신이 부정된 것이다. 그들 손에 들린 것은 결국 창조와 해방이 거세된 무능한 신, 짠맛을 잃은 율법,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성전이 전부였다.

모세의 신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절규하던 이들의 신, 자신에게 희망을 둔 이들의 신이었다. 모세의 신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의 논쟁적 부활에 속해 있지 않다. 오늘날도 부활에 대한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부활은 ’산 자와 죽은 자‘ 그 이상의 물음인 것이다. 그 물음은 오직 예수에 의해 주어지고, 예수에 의해 답해질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을 통해 이를 입증했으며, 십자가 위에서 자신에게 희망을 둔 사람들의 열망을 자신의 열망이 되게 했다. 이들과 신의 물음은 각각의 물음이 아닌 것이다. 하느님이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했으며, 산상수훈에서 호명된 이들이 곧 하느님(예수) 자신이다. 가장 부활을 열렬히 희망한 이들은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지켜질 것 또한 의심치 않았다. 사두가이들은 마카베오(시대)의 일곱 형제(2마카 7,1-2.9-14)가 품은 희망을 부정하고, 대를 잇지 못한 일곱 형제와 함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부활에 대한 부정은 곧 성경 전체를 통한 역사의 하느님을 부정하는 행위고 자신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그는 믿는 대로 죽을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위령 성월은 죽은 자들을 ’위한‘ 성월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 있음을 축하하는 성월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문제가 아니며, 이승의 삶이 그대로 저승에서 재현되는 문제도 아니다. 이승의 삶에 이미 저승이 있다는 메시지다. 예수의 부활은 이에 대한 방증으로 자신은 살아 있으며, 더는 무덤 앞에서 자신을 찾지 말 것을 명한다. 이는 실로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품에 안은 이들, 의로움으로 박해받는 자들, 율법을 모르는 죄인들, 하늘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자들은 모두 살아 있으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죽음을, 죽은 자를 대하는 근본적 태도요 이유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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