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교구 정평위, 5.18 40주년 광주순례

가톨릭 신자들이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광주를 찾았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위령 성월을 맞아 마련한 “광주 순례, 민주의 기억 40년 따라가기”는 9-10일 진행됐으며, 의정부교구 6지구장 서근수 신부와 의정부교구, 서울대교구, 대전교구 등에서 온 신자 등 30명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인 남동 성당, 옛 전남도청과 광주 가톨릭센터, 국립 5.18민주묘지 등을 직접 찾아가 5.18의 역사적 의미를 기억했다.

첫날에는 5.18기념재단 김양래 이사(아오스딩)의 안내로, 광주광역시 금남로 일대를 돌아봤다. 김 이사는 5.18 당시 전남대 4학년생으로 학원민주화 활동을 하다 투옥됐고, 형 면제로 조비오 신부와 같은 날 풀려난 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간사(1982-91년)로 활동했다.

김 이사는 먼저 참가자들을 남동 성당으로 안내했다. 그에 따르면, 이곳은 5.18 당시 뜻있는 사제와 재야 민주인사가 모여 수습책을 논의하던 자리다. 당시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대책을 계엄군에 전달했지만 계엄군은 이를 무시했다.

이에 남동 성당 주임인 김성용 신부가 광주를 탈출해 서울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광주의 참상을 보고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이”라는 수기로 계엄군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이 때문에 김 신부는 투옥됐고 1981년 8.15특사로 풀려났다.

광주광역시는 남동 성당을 2005년 25번째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로 지정했고, 광주대교구는 5.18기념성당으로 선포했다.

김 이사는 1980년 6월 말쯤 본당에 파견된 광주대교구 사제 20여 명 가운데 8명이 보안대에 끌려가고 군인과 경찰이 추모미사를 막기 위해 총을 들고 성당 둘레를 폐쇄한 상황에서도 사제, 신자, 시민의 열의로 결국 계엄당국도 천주교 미사만은 막지 못했고 7월부터 매주 추모미사가 봉헌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김 이사는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주교가 위험을 느끼고, 미사를 중단해야겠다고 결정했지만,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러 담을 넘고, 사제들의 의지가 크자 5.18에 대한 모든 논의를 사제들과 함께했다”면서 “신자만이 아니라 유족, 부상자, 투옥 가족 등 시민들이 몰려오면서 성당 안에 다 들어갈 수 없어 마당에 스피커를 설치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남동 성당.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 제25호이자 광주대교구가 선포한 5.18 기념성당으로 5.18당시 수습대책위원회가 모인 장소다. ⓒ김수나 기자

“5.18 흔적 지우기에 광주는 분노”.... “전일빌딩, 공중 사격 증거, 진상규명의 새로운 의미 던지는 곳”

그다음 방문지인 옛 전남도청에 대해 김 이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겪으며 5.18 흔적 지우기가 진행돼 광주시민의 분노를 샀다고 설명했다. 

5.18 항쟁의 중심지인 옛 전남도청은 지금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이 됐다. 노무현 정부 때 5.18 정신을 인권, 문화적으로 이어 간다는 취지로 계획돼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쳐 2015년 개관했지만 그 과정에서 5.18의 흔적이 대거 지워져 갔다.

도청의 부속 건물이 헐리고 전체 건물 벽을 흰색으로 칠해 총탄의 흔적을 가렸고, 지하철 출구를 설치하고 전시나 문화행사 공간으로 주로 쓰이게 하면서 5.18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이사는 “5.18때 총탄이 80만 발 발사됐다. 도청 건물에 남은 무차별적 총탄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하고 단지 문화, 전시공간으로만 쓰는 것에 광주시민은 분노한다”면서 “시민군이 총기를 반납하던 도청 정문 옆 수위실도 허물었다가 광주 시민이 반발하자 다시 지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 의해 이러한 흔적 없애기가 계속 됐다”면서 “시계탑은 모든 것을 보고 있다. 5시 18분이 되면 당시를 기억하기 위한 알람이 울린다”고 말했다.

옛 도청 앞에 있던 시계탑은 5.18민주항쟁의 상징물로서 1980년대 중반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지시로 광주시에 의해 한밤중에 뜯겨져 농성동 농성광장으로 옮겨졌다가 5.18 35주년인 2015년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시계탑에서는 매일 오후 5시 18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온다.

참가자들은 시계탑을 지나 전일빌딩 앞에 섰다. 김 이사는 “전일빌딩이 공중 총격이라는 진실이 밝혀진 매우 중요한 장소로, 5.18 진상규명에 새로운 의미를 던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원래 개인 소유의 건물이었으나 2011년 광주시청이 매입한 뒤, 이 건물에 근무했던 사람이 제시한 탄피와 총알 파편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조사 결과 10층의 창문 쪽 기둥과 바닥 등에서 184개의 총알 흔적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김 이사는 “국과수에 의해 이 총탄이 건물보다 높은 곳에서 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는 공중 사격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자유한국당의 반발로 활동을 못하는 상태”라는 사실도 지적했다.

현재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시행된 지 13달이나 지났지만, 자유한국당이 위원 추천을 지연시키면서 조사위원회가 출범하지 못하는 상태다.

5.18 민주화 항쟁의 마지막 항전지 옛 전남도청 건물.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이 조성되면서 건물을 하얗게 칠해 버려 당시의 총탄 자국이 보이지 않게 됐다. ⓒ김수나 기자

“이미 내려진 발포 명령과 공중 사격 증거, 시민들 무기도 없는데 군은 자위권 주장”

당시 총상으로 숨진 이들의 70퍼센트 이상이 머리와 흉부 총상으로, 이는 망원렌즈를 낀 총으로 시민을 조준해 쏜 것이며 가까운 건물 옥상에서 시위 주도자를 겨눈 것이 드러났다고 김 이사는 설명했다.

또 5월 21일 집단 발포가 있기 직전 가톨릭 신부들이 호남동 성당에 모여 시민에게 총을 쏘지 말라는 현수막을 쓰고, 계엄군에 전화해 우리가 나갈 테니 총을 쏘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계엄군이 나가지 말아라,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통보한 것은 이미 사격명령이 있었던 정황이라고 김 이사는 봤다. 

이날 계엄군 설득이 무산되고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이뤄진 직후 조비오 몬시뇰이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 당시 시민들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하늘과 땅에서 총격이 이뤄진 것에 대해 군은 자위권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두환 씨는 내란목적 살인죄로 1996년 1심 재판에서 사형,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란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1980년 5월 21일 집단 발포부터 5월 24일까지의 총기 살인에 대해서는 군의 자위권이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서도 김 이사는 다시 논의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공중 사격을 증명하는 전일빌딩(왼쪽, 리모델링 공사로 포장이 덮여 있다)과 5.18 당시 시민들이 집결했던 상징적 장소인 시계탑. ⓒ김수나 기자

“5월 19일, 이곳 6층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려다본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다” -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이어 참가자들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찾아갔다. 이곳은 5.18 당시 광주 가톨릭센터이자 광주교구청이 있던 건물로 6층에는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자 김수환 추기경에게 계엄군의 만행을 알린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이 복원돼 있고, 가톨릭의 활동상이 전시돼 있다.

이 기록관에는 학술자료, 재현물, 정부와 군사법 기관 자료, 시민 기록과 증언, 기자들의 사진과 취재수첩, 피해자의 병원진료 기록 등 다양한 기록물이 보존, 전시돼 있으며, 이는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김 이사는 “가톨릭이 5.18의 참상을 가장 먼저 알렸지만, 당시 윤 대주교가 신부와 신자들에게 직접 보고 겪은 것만 말하라고 당부하면서 가톨릭이 밝힌 사실은 시비를 당하지 않았다. 사실과 관련된 것만 말했기 때문”이라면서 “윤 대주교는 한 번도 진실과 관련된 내용에서 뒷걸음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윤 대주교가 감옥에 갇힌 신부들을 데려올 때도 “내란과 관련된 조사를 받던 중 석방한다”는 서류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던져버리고 신부들에게 좀 더 감옥에 있으라 하고 다시 돌아왔던 것과 5.18을 계기로 평소 즐기던 파이프 담배와 골프도 그만두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윤 대주교가 전면에 나서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5.18의 진실에 대한 것만큼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5.18 뒤로도 위험을 무릎 쓰고 관련 책자를 만들도록 하는 등 뒷받침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1980년 전두환이 지휘하는 계엄당국은 언론을 철저히 검열하고 통제했다. 왼쪽이 검열 전, 오른쪽이 검열 뒤 발행한 신문. 김양래 이사는 "당시 언론은 5.18의 철저한 가해자"라고 말했다. ⓒ김수나 기자

김 이사는 “5.18을 겪으며 광주에서 가톨릭이 신뢰 받은 것은 광주시민의 생각, 억울함에 가톨릭이 관심을 두었고 그것에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당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성당으로 몰려왔다. 겨울에 비닐을 쳐서 미사를 드려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80년대 광주대교구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성당을 짓느라 전부 공사판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교회가 그들을 수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이들이 가톨릭을 떠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 이사는 5.18 역사 왜곡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비판했다.

그는 “아직도 5.18을 폭도에 의한 것이라 왜곡하는 세력이 많지만 이를 바꾸려는 정부의 의지가 없다”며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으로 죽은 군인도 전사자, 국가유공자가 됐고, 보훈처에는 계엄군이 적과 폭도와 싸웠다고 기록돼 있다”고 비판했다. 그 적과 폭도는 다름 아닌 광주시민이다.

5.18 역사 왜곡과 명예훼손 등을 하나하나 법적으로 대응하는 지난한 과정이 계속되고 있지만 진상규명조사위원회도 출범하지 못했고, 역사 왜곡도 바로잡지 못하는 상황을 김 이사는 지적했다.

옛 광주 가톨릭센터 6층에 있는 당시 윤공희 대주교 집무실. 윤 대주교는 저 창문에서 계엄군에게 맞아 죽어 가는 시민을 봤다. ⓒ김수나 기자

“언제까지 5.18을 말할 것인가.... 암매장, 행불자 등 밝혀지지 않은 진상 아직 많아”

한편 이날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서대석 씨(빈첸시오, 현 광주광역시 서구청장)가 광주 지역 노동자, 지역운동가, 학생들의 5.18 전후 활동상을 들불야학 7열사의 삶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당시 광천동 성당 교리실을 빌려 쓰던 들불야학은 광천공단 노동자와 지역운동가, 학생들이 서로 배움을 주고받았던 곳으로, 5.18 당시 왜곡과 거짓을 일삼거나 무력했던 언론을 대신해 <투사일보>를 내면서 당시 광주의 상황과 시민의 요구, 행동강령 등을 전했다.

서대석 씨는 “광주 5월을 말하면서 들불야학을 빼놓을 수 없다”면서 노동, 문화, 여성, 지역, 학생운동을 벌이며 5.18 민주화 항쟁의 중심에서 활동하다 희생된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 박관현, 신영일 열사의 주요 활동을 설명했다.

그는 5.18 당시 아들의 생사를 몰랐던 자신의 부모님이 화순에서부터 걸어와 상무관에서 일일이 시신을 확인했다면서 “이런 일은 무수히 많았다. 억장이 무너지고 광주시민의 한이 돼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밖에서는 언제까지 5.18을 말하느냐고 한다. 광주 사람들도 5.18에 갇혀 있자는 것이 아니라 진상이라도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라며 “암매장된 이들, 행불자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매우 많다. 4.3, 부마, 여순 항쟁도 조금씩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지역에만 갇혀 있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안내를 듣고 있는 참가자들. ⓒ김수나 기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순례 둘째 날 참가자들은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분향소에 이르러 서근수 신부가 대표로 분향하고 다 함께 묵념했다. 이곳에는 5.18 당시 희생자 165명을 비롯해 그 뒤 고문 후유증 등으로 숨진 이들까지 모두 843기가 안장돼 있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해 봉분을 올리지 못한 이들의 묘도 1묘역 한쪽에 마련돼 있다.

참가자들은 고명숙 해설사(5.18기념재단 오월길 안내해설사)에게 제1묘역을 중심으로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들었다.

하굣길에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돌아오다 총상으로 숨진 박금희 양,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남편을 기다리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최미애 씨, 청각장애인으로 극심한 폭행으로 두부처럼 으깨져 숨진 5.18 첫 희생자 김경철 씨, 대동고 학생으로 민주, 정의 자유를 위해 앞서간다고 일기에 쓰고 총상으로 숨진 전영진(시몬) 군,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모티브가 된 인물 광주상고 문재학 군....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의 봉분이 없는 가묘. ⓒ김수나 기자

“우리는 왜 여기에 왔는가, 진실 풀어내는 것이 우리 과제”

첫날 저녁 참가자들은 이번 순례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서근수 신부는 “자신 밖으로 향하는 관심,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려 했던 모습, 누군가 나로 인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다는 그 정신이 와닿았다”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자”고 당부했다.

한 참가자는 “우리가 여기에 왜 왔는가 이야기 나누고 진실 되게 풀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지적했고, 또 다른 참가자들은 “5.18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많은 영향을 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모일 수 있다는 것도 큰 변화”라고 말했다.

한 참가자는 “지역감정 등 옳다고 맞다고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넘어 왜곡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혼란을 느꼈다. 이곳에서 귀한 이야기를 들어서 감사하고 알아야 할 것은 다 알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같이 가슴 아파하고 미안해 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다”, “내 나라, 내 국민을 죽여 놓고도 떳떳이 살아가는 책임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소감도 나눴다.

당시 희생된 165위의 영정이 봉안된 '유영봉안소'. ⓒ김수나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