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근동지역 대화와 평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프란치스코 교종, 11월 기도지향 발표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 기도지향이 담긴 영상 메시지를 통해 근동지역에 종교 간 대화와 평화의 분위기가 가득하기를 기도했다. 

메시지 전문.

근동지역의 세 유일신 종교(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사이의 대화와 화합은 영적, 역사적 유대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서 시작됐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대교, 이슬람교 공동체와 함께 이곳에서 평화, 화해, 용서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동지역에서 대화와 만남과 화해의 정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부활은 삶의 의미요 목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위령미사 강론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4일 올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추기경과 주교들을 위한 위령미사 강론에서 각자가 부르심 받은 부활에 관한 묵상을 위한 세 가지 길을 제시했다. 교종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도록 이 세 가지 자극 중 적어도 한 가지에 자극을 받을 수 있게 내어 맡깁시다.”라고 강조했다. 2019년 한 해 동안 현재까지 13명의 추기경과 147명의 주교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강론 내용.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각자 자기 여정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로 나아가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 주위만 맴도는가? 내 여정의 방향은 어디인가? 나는 단지 좋은 모습을 보이려 하고 내 역할, 내 시간과 내 공간을 방어하는 데 급급하는가? 아니면 주님께로 나아가는가?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그분께로 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물리치신다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중도(中道)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 주위를 맴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그분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며 살아갑니다. 삶이란 벗어남(uscita)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해, 삶의 여러 단계를 거쳐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이르기까지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벗어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이 세상에서 벗어난 우리의 형제 추기경과 주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다른 모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벗어남’을 잊어선 안 됩니다. 곧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는 삶입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문을 열게 됩니다. 이러한 은총을 청합시다.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자들에 대해 경건한 생각을 가졌던(2마카 12,45 참조) 사례를 따라, 또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라는 성 바오로 말씀에 따라, 우리가 묵상해야 할 두 번째 길 또한 ‘온정주의’나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부활의 문제인 만큼 삶에 대한 질문을 토대로 이뤄집니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은 영원의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대합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성 바오로가 상기시켜 주듯 ‘사랑이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다.’(1코린 13,8)면 바로 그 사랑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다리 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나는 필요에 처한 누군가의 상황에 마음이 움직이도록 내 자신을 내어 맡기는가? 나는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가? 나는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가? 이는 온정주의나 단순한 자선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질문이자 부활의 문제입니다.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자극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가르침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영신수련'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회 창립자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어떤 결정이 방향을 잘 잡은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결정이 부활에 더 가까운 것인지 보는 법을 제안합니다. 성 이냐시오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그 순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이 나타날 부르심이요, 모든 이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도착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서 취한 삶의 모든 선택은 방향을 잘 잡게 됩니다. 삶의 의미요 목표인 부활에 더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눈으로 현실을 보기 위한 유익한 수련입니다. 이 세 가지 자극 중 적어도 한 가지에 자극을 받을 수 있게 우리를 내어 맡깁시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염원에 더 일치할 수 있을 겁니다. 곧,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요한 6,39 참조) 존재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 세상의 목소리가 수없이 나오는 가운데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예수님의 뜻에 일치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부활의 여명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죄”

교종, 11월5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5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주님께서는 그분과 만나는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시지만 우리의 거절 때문에 광장에 있던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데려오라고 당신 종을 보내십니다. 나는 무엇을 더 좋아하는가? 주님의 초대를 항상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의 일들에 나의 옹졸함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리는가?”를 자문해 보라고 초대했다. 

강론 내용.

오늘 전례에 제시된 복음구절(루카 14,15-24)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싶어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그의 초대를 거절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자 그는 가난한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불러 자기 집을 가득 채우고 잔치 음식을 맛보도록 종들을 내보냅니다. 이 이야기는 구원역사와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잔치와 잔칫상은 하늘나라의 모습이며, 주님과의 ‘영원한 만남’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잔치에서 누구를 만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기도 하며,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마주하지만, 잔치 분위기는 ‘기쁨과 거저 베품’입니다. 

참된 잔치란 거저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항상 이처럼 우리를 초대하시고, 입장료를 받지 않으십니다. 참된 잔치는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주인과 초대하는 사람이 지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상성’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첫 자리에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상성과 잔치의 보편성 앞에서도 마음을 닫아버리는 태도가 있습니다. ‘나는 잔치에 가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사람들과는 차라리 마음을 닫는 편이 더 좋아.’ 이런 태도는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요,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닫힌 마음 말입니다. ‘아닙니다. 저에게는 저것보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닙니다. 제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항상 나의 것을 먼저 찾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거절은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곧, “당신의 잔치로 저를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주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 곧 그분과의 만남의 기쁨에 마음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번번이 이러한 선택과 이런 결정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의 무상성,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는 것을 선택하거나, 나의 일들에 나의 이익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닫혀있는 것들 중 하나를 언급하시며,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훌륭하고 거룩한 부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재물에 집착하고, 마음이 닫혀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만질 수 있는 사물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모두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거절 앞에서 주님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주님께서는 잔치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 급기야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부르십니다. 모두 초대받았습니다. 모든 사람 말입니다. 아무도 “저는 나쁜 사람입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악인이라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나는 무엇을 더 좋아하는가? 주님의 초대를 항상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의 일들에, 나의 옹졸함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리는가? 거저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잔치를 항상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사회적, 관계적 책임을 가르치십시오”

교종, 국제 가톨릭대학연합회 회원들에게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4일 국제가톨릭대학연합회(IFCU) 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학 연구의 결실은 관계적, 사회적 목적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지도자들을 위한 새로운 개척지: 건강의 미래와 대학의 생태계’를 주제로 11월 4-5일 로마에서 열린 국제가톨릭대학연합회(이하 IFCU) 포럼은 오늘날 대학의 변혁을 주도하는 문제와 도전을 다룬다. 

교종 연설 요지.

교종은 연설에서 이러한 도전의 일부를 간략히 설명했다. 교종은 자격 갖춘 전문가를 위해 미래 세대를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관한 올바른 전망과 함께, 사회와 시민생활에서 창의적이고 책임 있는 지도자, 공동선의 지지자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오늘날 대학이 개인의 온전한 건강과 포괄적 생태론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가톨릭 대학들은 연대를 특징으로 각 개인과 인류를 위한 시민적, 문화적 진보에 관한 해결책을 인내와 전문성과 함께 추진해 나가는 자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교종은 ‘기술과학’의 발전, 혹은 인류가 기술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점점 사람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교종은 대학의 가르침 속에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왜’라고 묻는 것”이 담겨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교종은 모든 학과목의 기초와 목적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면서 윤리적 차원에서 지식만 추출해서 전달하는 건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교종은 “왜”라는 물음을 마주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모든 지식의 영역과 관련된 교육의 인식론적 특성이 포함되며 지식과 목적 사이의 연결은 ‘지향성’이라는 주제와 모든 인지과정에 있어서 주체의 역할과 관련된다고 설명했다. 교종은 또 완전한 비인격적인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러한 관점에서 대학은 지성적이고 도덕적 에너지를 갖춘 책임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며, 단지 교육받는 사람만 있는 곳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의 요구를 다루면서 확장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국제가톨릭대학연합회의 도덕적 의무는 개인과 민족의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편정신을 개발하기 위해 보다 일치된 국제 학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종은 “대학의 모든 구성원이 전인적 인간에 집중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성장하는 상황 및 그들의 진보에 기여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키울 때, 대학들의 생태계는 발전합니다.”며 대학 지도자들이 정신뿐 아니라 ‘마음’, 곧 양심과 학생들의 응용력을 발전시키는 목표를 학사일정에 녹여내야 양성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교종은 연구의 결과는 관계적이고 사회적 목적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교종은 국제가톨릭대학연합회 수호성인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을 인용해 “교회는 지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본성적 요소를 아무것도 억압하지 않으며 다만 전체를 길러 냅니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