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1월 24일(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 2사무 5,1-3; 콜로 1,12-20; 루카 23,35ㄴ-43

예수의 십자가 옆에 두 죄수가 함께 매달려 있다. 한 죄수는 예수에게 조롱을 퍼부었지만 다른 죄수는 그를 나무랐다. 놀라운 점은 이 죄수가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같은 죄수(?) 예수를 알아보고 그의 최후 변론자요 증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낙원이 ‘선생님의 나라’임을 알았고, 예수는 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루카 23,42-43)이라 화답한다. 예수의 ‘낙원’에 대한 발언은 그의 첫 공적 무대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말해지고 행동으로 실천되었다. 낙원이 시공간을 초월한 어디 4차원의 세계에 있으려니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쯤에서 상상을 접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수의 낙원행에 올라탄 죄수는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가장 마지막 시간 결정적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한 운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마치 오후 5시 마감 시간 전 포도밭에 채용된 그 운 좋은 실업자와도 비견된다. 이야기의 요지는 구원이 인간의 양적 공로나 도덕적 판단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이라는 데 있다. 예수가 언급한 ‘낙원(하느님나라)’은 평생 팔자를 고치는 곳도,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미완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곳도 아니다.

유대 사회에서 팽배한 이런 물질 개념이 메시아와 그의 나라를 오염시켰기 때문에 예수는 공생활 내내 어디에서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었다.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냐고 물었을 때에도 그는 ”너희가 본 대로 가서 일러라“(루카 7,18-23) 하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왕의 나라, 왕의 시간은 인간이 기대하는 때나 낙원과 전혀 달랐으므로 그 어떤 언급도 무익하다.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오늘 십자가 처형 ‘때’에 와서 비로소 공식적 ”예스!“로 답해진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예수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했던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감춰 있던 그의 정체는 십자가 위에서 듣도 보도 못한 죄수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를 좇던 사람들이 실망해서 돌아선 순간에 오히려 죄수는 예수를 붙들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나라를 깨닫게 된 것은 이후 십자가로부터의 역 추적 결과였다. 십자가를 밀치고서 예수의 말과 행동을 알아듣기는 어렵다. 예수의 메시아성을 풀 수 있는 가장 결정적 ‘키’는 십자가뿐이다.

세 십자가. (이미지 출처 = Pixabay)

웬만한 신앙인이면 이런 정도의 상식은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렇다. 그러나 자신이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사형 언도(사회적 매장)’를 받게 되면 얘긴 달라진다. 사형이란 게 다른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쌓아 온 인간관계, 명예, 칭송, 우정, 자존심 따위들이 날카로운 비수로, 창으로 역공을 당하는 것, 내 삶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 그것이 사형이다. 생에 이런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을 견디게 하는 그 ‘무엇’, 죽더라도 지켜 내야 한다고 믿게 하는 ‘무엇’, 그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복되다. 예수에 의하면 낙원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알제리의 ‘아틀라스 성모 수도원’ 일곱 형제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엔 2010년 ”신과 인간“이라는 영화로 소개된 바 있다. 이들은 1996년 5월 21일 알제리의 ‘무장이슬람단(GIA)’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다 영화를 통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이들 죽음의 의미가 재해석 되는 기회를 맞았다. 수도승들이 실종된 뒤 수도원에서 발견된 크리스티앙 원장의 유서 내용은 일곱 수도자들이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어떤 생각으로 보내게 했는지 가늠하게 한다. 이 유서는 1993년도에 작성되었으니 이들은 무려 3년이란 시간을 죽음과 함께 살아갔던 셈이다. 충분히,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알제리의 가난한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선택했다. 유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수도승들은 알제리 정부나 프랑스 본국으로부터 수도회 철수를 종용받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무모한 행위라고, 꼭 그런 선택이어야 했냐고 나무랄 수 있겠지만 유서엔 이런 세인들의 비난을 간단히 제압하는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유서를 통해 왕의 낙원에 든 수도자들이 선택한 그 무엇을 만나 볼 기회다. 극히 일부를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날, 오늘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테러리즘에 희생이 된다면 우리 수도공동체와 성교회와 가족들은 제 삶이 하느님께 그리고 이 나라에 온전히 바쳐진 삶이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울러, 저처럼 혹독한 폭력 아래 죽어간 수많은 이, 끝내 무관심 속에 버려진 이름 없는 이들의 죽음을 저의 죽음과 함께 연결시켜 생각해 주십시오. 불행히도 악의 세력에 죽을지언정 저 또한 지금은 그와 같은 악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하느님께 그리고 온 인류 가족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제 목을 내려치게 될 그 사람까지도 마음을 다하여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 저를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여긴 사람들은 저의 죽음에 대해 ‘이제 당신이 생각하던 바는 어찌되었소?’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당신의 자녀 이슬람의 아이들을 아버지께서 보시듯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끝난 생명 이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땅의 친구들,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담으렵니다. 그리고 또, 마지막 순간의 친구여, 스스로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그대도 함께 담으렵니다. 또한 주님 곁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 둘 다 복된 ‘죄수’로 낙원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아멘. 인샬라!”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