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 2017

여기 문제적 소설이 있다.

아니 문제적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소설. 세대와 계층, 노동과 노인 문제, 성소수자, 정상가족 담론 등 한국 사회의 여러 현실적 문제를 섬세한 눈길로 되짚는 소설.

필자에게 이 소설은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고독하게 문을 연 식당에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먹는 일처럼 조금은 쓸쓸한, 동시에 데워진 몸 덕분에 잠시간 다정한 위안이 밀려오는 느낌을 안겨 준 소설이었다.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들 때문이 아니라, 이런 소설을 쓴 작가의 마음에서 나는 어떤 위안 같은 것을 받았다.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그것은 분명 내게 점도 높은 위안이었다.

사실상 소설의 내용은 우리에게 위안은커녕 비참할 정도로 냉엄한 현실과 삶의 부조리를 보여 준다.

소설 "딸에 대하여"는 60대의 요양보호사인 화자인 나(엄마)가 자신의 딸, 동성애자이며 대학의 시간강사인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30대 중반의 딸과 딸의 동성 파트너를 바라보는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진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젊은이들의 불안한 미래,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는 목소리, 늙는다는 것에 대한 주눅 듦과 불안, 치매 노인의 인권, 성소수자의 문제, 가족주의와 정상가족 담론 등 많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소설적 측면으로만 본다면 "82년생 김지영"이 중산층 여성이라고 하는 한정적 서사에만 머물렀다 해도 개인적으로는 소설적 언어를 갖지 못해 아쉬웠다면, 이 소설은 "82년생 김지영"보다 더 많은 사회적 담론을 담고 있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적 문체와 소설적 분위기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은 채 끌고 간다. 깊이 있는 시선과 야무지고 단단한 구성력, 사건의 개연성과 논리성 안에서 드러나는 주제의식, 종종 나(엄마)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문장들,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 2017. (표지 제공 = 민음사)

매일이 어제보다 오늘 더 늙어 갈 일밖에는 남지 않은 주인공 나(엄마)에게 늙는다는 것은 단순한 상실뿐이 아니다. 자식 키우던 일의 기쁨과 허무감, 다 자란 자식의 상상도 하지 못한 성 정체성의 비밀,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오직 자기 몸을 통해 여전히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육체노동의 고단함과 막막함을 나(엄마)를 통해 작가는 섬세하고도 담담한 언어로 속삭이듯 말한다. 그 속삭임이 종종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기까지 하다.

그 슬픔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주인공 나(엄마)와 나의 딸, 그리고 딸의 동성 파트너와의 관계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개연성 있는 사건들로 이어진다. 게다가 소설은 심미적이다.

나(엄마)의 입장과 딸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설 때 나(엄마)는 전통적 가치 속에서 딸을 도저히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딸 역시도 젊은 열정과 혈기로 사회 정의와 불평등을 위해 투쟁하고 엄마의 전통적 가치를 따를 마음이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전통적 가치들, 가부장적 이념들을 깨기 위해 애를 쓴다. 딸과 그녀의 파트너, 지금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젊은이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차별과 불평등에 자기 목소리를 내며 계속 싸워 나간다.

하지만 이 소설이 필자에게 어떤 위안과 희망이 되어 주었던 지점은 기성세대, 즉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는 어른 세대를 대표하는 나(엄마)라고 하는 한 개인이, 또 다른 개인(딸)을 이해해 보려는 모습 때문이었다. 자신의 상황 역시도 처절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는 모습.

딸의 파트너를 부정적 시선으로 완강히 거부하지만 함께 지내면서 그녀 또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 자신의 딸과 같은, 때로는 딸보다 더 살갑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본질적 측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자기 안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차분하게 독백한다. 결국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나(엄마)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마저 느껴진다. 그것은 섣부른 포기도 체념도 아니다. 그 과정은 나(엄마)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인간이 한 인간을 받아들인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의 과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세계 속을 빠져나와 타인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이며 결국엔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이해의 경험이다.

자신의 딸에 대한 분노와 울분, 냉정함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습, 그리고 결국 적당한 포기 사이를 걸어갈 때 엄마인 나는 깨닫는다. 자식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임을. 자식을 나와 다른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계층과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의 모든 이해관계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 존중이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는 지금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닐까.

요양보호사인 나(엄마)는 요양병원에서 80년대 젊은 날을 입양아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활동을 한 ‘젠’이라는 여성을 맡아서 돌보고 있다. 그녀는 젊은 날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결국 요양병원에서는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용변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같은 노인이 더 늙어버린 노인을 돌보며 바라보는 시선과 안타까움. 심지어 한 번 쓴 기저귀조차 잘라서 신문지를 덧대 한 번 더 사용하라는 요양병원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요구에 치매에 걸린 젠 대신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는 주인공 나의 모습은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는 무수하게 겪게 될 치매나 노인 환자에 대한 반인륜적 행위의 작은 고발로도 느껴졌다.

우리는 이미 인구 절벽과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앞으로 거대한 수의 노인 인구와 그에 따른 질병의 문제들, 특히 치매와 요양 병원 등의 문제들은 여전히 국가 차원에서 지원이 되거나 관리되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100세 시대가 온다는 것은 아주 부유한 몇몇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서민에게는 긴 고통과 재앙의 시대처럼 느껴진다. 예전엔 60이면 은퇴 후,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궤적을 되짚고 정리하는 시간들로 삼았다면, 지금의 60대는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젊은이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꾸준히 공부하고 정보력을 가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젊은 날 평생을 일해도 앞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20년 가까이는 더 늘어난 셈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시대적 문제를 주인공(나)의 독백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요하고 어두운 방에 누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끝도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

끝도 없이 노동을 해야 하는 시대. 오래 사는 것이 고달프고 형벌 같은 시대. 누구도 우리 모두를 이런 경쟁과 차별과 계층 간의 간극에서 느껴야 하는 깊은 외로움에서부터 구해 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보다 더 오래 그것들을 견뎌야 한다.

나(엄마)의 시선은 이제 딸에게로 옮겨진다. 늘 자고 나면 가파르게 오르는 집값과 늙어서도 자신의 몸을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는 처지, 자신이 싫은 것과 싫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제약적 삶의 가난을 나(엄마)는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딸이 적당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려 남들처럼 아이 낳고 살아가는 정상(?)가족을 구성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딸은 여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이며 자신의 파트너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나(엄마)를 실망시킨다. 아니 실망 정도가 아니다.

딸은 많은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여기저기 전국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대학의 비정규직 시간 강사의 삶을 살아간다. 결국 집세를 낼 돈마저 없어 주인공 나(엄마)의 집으로 파트너까지 데리고 들어와 의지한다. 그런 딸을 보는 나(엄마)의 시선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라고 묻는 나(엄마)의 전통적 가치와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라고 대답하는 딸의 새로운 가치 사이의 대립. 이것은 누구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시대적 흐름에 따른 다양한 가족 형태의 새로운 등장이며 그 등장이 여전히 어른 세대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정상가족’이라고 하는 프레임을 고수하려는 기존 가부장적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대표적 갈등이다.

개인적으로 김혜진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30대의 그녀가 한국 사회의 여러 다층적 문제들을 작품 속에 이토록 촘촘히 녹여낸다는 것은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다. 올해 필자가 읽은 소설 중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서평 첫 부분에 이 소설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위안을 받았다는 건, 세상은 우리를 많은 프레임 속에 갇히게 하지만 오히려 작가는 프레임 속에 갇힌 인간의 모습, 그 안의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막막함들이 결국 위치성을 떠나 모든 인간이 느끼는 생존의 슬픔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필자에게는 작가 안에서 인간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사랑이 느껴졌다.

소설은 결코 친절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읽는 내내 마음이 고요히 아프고 서늘했다. 울컥거렸으며 눈물이 나기도 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 그러나 불쾌한 통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전해져 오는 가슴 떨리는 통증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것은 분명 냉혹하고 가슴 아팠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작가의 말 한 구절을 끝으로 인용한다.

“지난해 여름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우리는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 나오는 이 말을 혼란과 숱한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고 싶다. 물론 ‘지금 여기’는 결코 아름답지도 환상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우여곡절과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이곳까지 잘 왔다. 그렇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고통과 아픔을 견디고 일 년을 잘 살아 ‘지금 여기’에 도착한 우리 자신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보낸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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