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1. 셋째 날(11월 24일 주일) 아침은 새벽부터 날씨가 흐렸다. 교황님이 집전하는 미사 시간에는 비까지 예보되었다. 밤사이 가랑비도 내렸다. 숙소를 떠나가는 길 중간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점심 먹거리와 우의를 샀다. 나가사키까지는 새벽부터 교통을 통제한 덕에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서둘러 원폭자료관 앞에 차를 세우고 교황님이 평화 메시지를 낭독하기로 예정된 ‘폭심지 공원’을 향했다. 이때부터 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우의를 걸치고 근처에 있는 조선인 피해자 추모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크게 세워진 일본인 희생자 추모비 옆 한 구석에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두 개 있었다. 화강암을 쪼아 만든 작고 초라한 기념비 하나와 최근에 만들어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오석(烏石)에 음각을 하고 금박을 입힌 조금 더 큰 비석이었다. 이 오석 기념비는 낡고 초라한 화강암 비석이 안타까워 뜻있는 이들이 모금을 해 세웠다고 한다.

일행은 이 기념비 앞에서 조선인 원폭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기도드렸다. 나는 이 기도 중에 이곳에서 희생된 일본인 피해자들도 기억하였다. 누군가 잘 표현하였듯이 부디 이곳이 ‘인류가 핵폭탄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곳’이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마침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희생자들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조선인 원폭피해자 추모비 앞에서. ⓒ박문수

2. 참배를 마치고 ‘폭심지 공원’을 향했다. 폭심(爆心)은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정 가운데에 속하는 곳을 가리킨다. ‘폭심지 공원’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될 때 폭심이 되었던 곳에 꾸민 공원이다. 폭심에는 하늘을 향해 높다랗게 오석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잠시 후 10시면 교황님이 이 기념비 앞에 헌화하고 기도를 바칠 것이었다.

비는 굵어지고 공원에 이르는 길은 보안검색을 받는 인파로 붐볐다. 우의가 닿지 않는 신발부터 무릎까지 서서히 젖어 오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전에 입장을 마치고 교황님이 도착할 때까지 쏟아지는 비를 힘겹게 우의로 버티며 앉아 있었다. 행사장에는 나가사키시 관계자들, 가톨릭계 학교에서 동원된 중고등학생들, 나가사키 교구 관계자 등 500여 명이 참석 중이었다. 전 세계 언론사에서 파견한 기자들도 비를 맞으며 취재에 열중하고 있었다.

교황님은 공원 뒤쪽에서 기념비 앞에 마련된 비닐 천막을 향해 입장하셨다. 교황님은 노구를 이끌고 다리를 조금씩 절며 경호원들이 씌워 주는 우산에 의지해 천천히 입장하셨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무대 정면에서 오른쪽 블록 중간쯤이었는데 그래도 손님이라고 꽤 배려를 한 곳이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첫 순서로 교황님이 희생자 추모비에 헌화하셨다. 2분여 동안 헌화하셨는데 비석을 쓰다듬으며 기도하시는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진심으로 희생자들의 아픔을 위로하시는 표정과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있었던 기도회에서 한 원폭 희생자는 이 모습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나도 날로 쇠약해져 가는 교황님의 모습, 부축을 받을 정도로 다리가 불편하신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렸다. “조금 더 사시면서 시작하신 일을 잘 마무리하시면 좋겠는데.… 부디 건강하고 오래 사시길.” 그러나 이내 나도 교황님이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부디 원폭 희생자들을 하느님께서 위로하시고 천국에서 받아 주시길….”

발밑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비에 튀긴 진흙이 신발과 바짓단을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교황님은 단 위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셨다. 교황님은 이탈리아어로 읽으시고, 전광판에는 일어로만 표기되어 내용을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핵심만은 명료했다. ‘핵무기 없는 세계’였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선언은 PCK 공동대표 가운데 한 분이신 박은미 헬레나 선생님께서 번역하여 공유하셨다. 참조를 바란다.)

십오 분 정도 걸린 행사가 끝나고 교황님이 빠져나가신 뒤에도 경호를 이유로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이 행사 뒤 교황님은 근처에 있는 ‘26성인 기념관’에 들러 헌화를 하셨다고 한다.

미사 시작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순회 장면. ⓒ박문수

3. 공원을 빠져나와 오후 3시에 교황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일행과 행사장인 나가사키 야구장을 향했다. 야구장은 폭심지 공원에서 도보로 7분 거리에 있었다. 행사장으로 가는 동안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야구장 앞은 보안검색을 기다리는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줄을 서서 기다려 드디어 야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두 시 조금 넘어서였다. 우리한테는 제대와 가장 가까운 운동장 구역 앞자리가 배정되었다. 외국인, 나가사키 소재 이웃 종교 지도자들을 위한 구역이었던 것 같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면서 비는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이며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야구장 벤치에는 큐슈 전 지역에서 참여한 신자들이 구역별로 앉아 있었고, 운동장에 마련된 좌석에도 빈틈없이 신자들이 앉아 있었다. 낡아 보이는 야구장에 소박한 신자들의 모습이 마치 시골 운동회에 참여하는 느낌이었다. 다해서 2만 5000명 정도 돼 보였다. 가톨릭 신자가 40만 밖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이 정도 참여하였다면 우리로선 40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셈이겠다. 이곳 신자들로서는 최선을 다해 모인 것일 터.

규모 있고 화려하게 맞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소박하게 교황님을 맞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푸근했다. 교황님도 이처럼 꾸밈없는 모습을 더 좋아하셨을 것이다. 나중에 도쿄돔에서 거행된 미사와 중앙 차원에서 진행하는 행사들을 보니 더욱이 이런 생각이 강해진다. 잘 모셔야겠지만 꼭 무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2시 40분경 교황님이 행사장에 도착하셨다. 교황님은 비 때문에 지붕을 씌운 퍼레이드카를 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셨다. 곳곳에서 아이들에게 입맞춤을 하거나 축복을 해주셨다. 우리 구역 옆으로도 지나가셔서 우리 일행은 그분을 가까이서 뵙는 호사를 누렸다.

미사 시간은 오전과는 반대로 해를 피하느라 힘들었다. 젖은 신발과 바지가 마르기 시작했다. 미사는 학생에서 성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신자들로 구성된 성가대의 인도로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고등학생들도 대거 전례봉사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신자들이 적은 교회다 보니 학생들의 도움도 절실해 보였다. 교황님은 당일 복음을 주제로 강론하셨다. 교황님이 주례하시고 많은 신자가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면 보통의 주일 미사와 다름이 없었다.

미사가 끝나고 보안상 이유로 20분 정도 기다린 다음 주최 측에서 안내하는 대로 빠져나오다 보니 미사가 끝난 지 거의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새벽부터 서둘렀던 데다, 아침엔 비, 오후엔 땡볕에 시달려 예정된 행사들을 취소하고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일행들은 오늘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행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폭심지 공원에서 쏟아진 비는 희생자들의 눈물 같았어요. 교황님이 헌화하고 기도하실 때 이분들이 많이 위로를 받으신 것 같아요. 교황님 미사 전에 날씨가 맑아지는 것을 보고 교황님이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셔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구장에서 드린 미사 때 일행과 함께. ⓒ박문수

4. 새벽부터 움직여 쏟아지는 빗속에서 폭심지 공원 행사에 참여하고, 교황님이 주례하는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였던 날이지만 우리 평화순례자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긴 하루였다.

폭심지 공원 근처 거리 한 모퉁이. 거의 눈에 띠지 않는 자리에 보잘것없이 박혀 있던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우리 일행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식민지 백성으로 남의 나라에 끌려왔다 영문 없이 희생을 당한 이들의 억울함이 느껴져서 였다. 이들의 아픔을 느껴 보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평화의 일꾼’의 자세 아니던가?

나가사키는 알다시피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순교로 신앙을 지켜 낸 신자들이 살던 곳이다. 그런 그들과 자녀들이 원폭에 다시 희생을 당했다. 의인들의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원폭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이 죽음을 ‘대속(代贖)’이라 해석하였다. 대속은 대신 속죄하는 것이다. 다른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가 대속이라 했을 때 신자들조차 그를 비난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 외에 나는 달리 이들의 죽음을 해석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무고한 이들의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실 나가이 박사처럼 일본이 저지른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박해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이 속죄 양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깊은 신앙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날 하루 종일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말을 떠올렸다. 나도 이분처럼 이런 비극 앞에서 담담히 ‘대속’이라 말할 수 있을까?

폭심지 공원에서 나는 원자탄의 폭발장면을 연상했다. 이 장면은 다음 날 찾았던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을 통해 더 구체화되었다. 폭심지에서 반경 700미터 안에 있었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폭심지에서 멀어질수록 피해의 양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즉사한 분들 말고도 피폭으로 사망한 이들, 2세에게까지 피폭 후유증이 나타난 경우들을 포함하면 꽤 많은 이가 원폭으로 희생당한 셈이다.

폭발 이튿날 복구 인력으로 파견한 이들의 상당수가 조선인 징용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방사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 이곳에 끌려와 복구에 참여했던 이들은 피폭으로 자신은 물론 2세들에게까지 상처를 안겼다. 식민지 백성이 겪어야 했던 참담한 비극 가운데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억울한 고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끄럽지만 나는 이번 순례를 계기로 한국에도 많은 원폭 희생자가 살고 계신 것을 알았다. 이곳에 끌려와 희생되신 분들에 대하여도 많이 알게 되었다. 평화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늦었지만 이분들의 존재와 고통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곳에 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나에게 평화는 무엇이냐고? 그리고 그대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고?’ 이렇게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와 폭심지 공원에서 만난 희생자들은 나에게 질문하였다.

박문수(프란치스코)

PCK 연구이사,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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