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1. 마지막 날(11월 25일 월요일) 오전 일정은 폭심지 근처에 세워졌다 파괴돼 근처에 다시 세운 우라카미 성당에서 열린 합동기도회였다. 이 기도회의 명칭은 ‘일·한 원폭 피해자를 위한 합동 기도회’였다. 본래는 두 나라 팍스 크리스티에서 준비하기로 했는데 일본 측이 교황님 방문으로 바빠 팍스 크리스티 재팬은 빠지고 대신 나가사키 교구 관계자들이 주관했다. 이 기도회는 나가사키 교구장 주교님이 제안하였다는데 역시 준비 인력이 부족한 탓에 평소 원폭피해자를 도와 온 일본 가톨릭 활동가들이 진행을 맡았다.

2. 나는 이 기도회를 2주 전부터 준비했다. 일본 측에서 다 준비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준비할 사정이 아니었던 탓이다. 나는 방문 일주일 전 기도회에 쓰일 떼제 성가 악보, 음원, 교회문헌 인용문, 기도문까지 자료집으로 만들어 일본 측에 보냈다. 일본 측에서는 따로 준비를 안 하는 대신 일본 참가자들을 위해 우리가 보낸 프로그램을 모두 일어로 번역해 참가자들에게 나눠 주겠다고 하였다. 서로의 말을 잘 모르기에 성가는 라틴어로 된 떼제 성가를 골랐고, 기도는 네 개 주제로 나눠 관련 주제에 해당하는 교회 가르침, 각각 두 개씩의 기도를 배치하고, 마지막에 성가를 부르는 식으로 진행하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게 프로그램을 짰다.

3. 우리 쪽은 기도회에 전날 폭심지 공원 행사, 교황님 주례 미사에 참석했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임원, 피해자 1, 2세 대표, 이분들을 동반하러 온 평통사 임원, 청년들과 PCK 순례단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우리 측은 사전에 이 정도 인원이 참여한다는 것을 일본 측에 통보했으나 일본 측은 기도회 직전까지 누가 또 얼마나 오는지 알 수 없었기에 다소 걱정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10분 전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기도회 장소는 성당 부속 강당이었는데 300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강당에 들어서니 무대 앞에 타원형으로 좌우에 의자를 40개씩 놓아 두었다. 무대 바로 앞에는 일본인 봉사자 3명이 사회를 볼 좌석이 준비돼 있었다. 봉사자 가운데 두 분은 우리말을 잘하셨다. 이분들은 우리말을 일어로, 일어를 우리말로 통역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려와 달리 일본 측에서도 원폭 피해자 1, 2세들, 성당 관계자, 여성 수도자, 한국어를 배우는 신자들 해서 거의 40여 명이 참여했다. <가톨릭평화방송>, 지역 언론사, 일본 가톨릭 언론사 기자들도 취재차 참여하였다.

두 나라 원폭피해자들과 함께한 기도회. ⓒ박문수

4. 기도회 앞부분에서 양측 대표가 기도회 취지를 설명하고 참가자들을 소개하는 순서를 가졌다. 이 소개 순서를 통해 일본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분들이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을 도와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을 수십 년간 무보수로 해 온 가톨릭 활동가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합천에서 오신 원폭 피해자의 증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기도회가 이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라틴어 성가였지만 다들 열심히 따라 부르고 기도가 끝날 때마다 ‘키리에 엘레이손’을 정성껏 노래했다.

기도회 말미에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대표들이 일본 측 참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런 기도회를 매년 돌아가며 개최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1시간 40분에 걸친 기도회를 마치고 우리가 준비해 간 종이 팻말을 들고 참가자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하는 것으로 오전 행사를 마무리했다.

잘 준비한 기도회는 아니었지만 두 나라 피해자들이 함께했고, 신앙 유무를 넘어 깊이 공감했으며, 서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 어떤 기도회보다 훌륭했다. 두 나라의 원폭 피해자들, 이들을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활동가들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였다. 우리 일행들도 느끼는 게 많았는지 다들 표정이 진지했다. 이렇게 수십 명이 이들의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 이 기도회는 그 자체로 큰 성공이었다.

5.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일행, 우리 순례단의 청년단원들이 먼저 떠나고 나머지 일행은 점심 식사 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을 방문했다. 나는 "나가사키의 노래"에서 묘사했던 피폭 현장의 모습을 사진들을 통해 확인했다.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은 상상보다 더 끔찍했다. 폭발 당시의 상황을 피해자 증언을 토대로 재현한 동영상은 원자폭탄이 공포의 무기임을 새삼 절감하게 해 주었다. 당시 피해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들의 소지품, 파괴된 건물에서 발견된 피폭으로 형태가 일그러진 물건들도 많이 전시돼 있었다. 이 물건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듯했다. 이 자료관을 먼저 탐방하고 전날 두 행사에 참여했더라면 우리의 기도가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아쉬웠다. 기념관 관람 뒤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 바로 길 건너 있는 성 필리피 성당을 방문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원폭 참상을 보여 주는 화염에 그을린 성상 앞에서. ⓒ박문수

6. 원폭 피해자 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준 것에 깊이 감사했다. 우리에겐 큰일이 아니었건만 이 작은 일이 이분들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폭심지 가까이 있었던 조선인들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화염에 불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두 나라 모두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 강제 징용도 서러운 일인데 자신이 일으키지도 않은 전쟁 탓에 남의 나라에서 이토록 모진 꼴을 당해야 했으니 이들의 억울함과 한을 누가 달래 주어야 하나?

간신히 생존한 희생자들은 평생 피폭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결혼 뒤에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녀들 때문에 힘들었다. 피폭은 천형에 가까웠다. 누구도 이들의 아픔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더러는 낙인을 찍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일본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외면했다. 자국민들만 치료해 줄 뿐 강제로 끌려가거나 돈 벌러 가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의 치료는 거부했다. 가난해서 떠난 조국이니 돌아온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았다.

우라카미 성당 입구에 있는 원폭투하시 그을린 성상. ⓒ박문수

7. 이들의 존재는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전쟁은 이렇게도 무고한 사람들을 고통과 파괴의 소용돌이에 밀어넣는다. 우리 땅에서도 그랬다. 전쟁이 벌어지면 어느 쪽이든 광기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하게 된다. 전쟁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인간 이하의 일들을 보라!

그래도 총칼로 싸우는 전쟁은 가해자가 외상후증후군이라도 앓는다. 그러나 핵 전쟁에서는 이런 의식조차 없다. 원폭을 투하한 군인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원폭 투하를 승인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이 사태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원폭투하가 후회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였을 뿐이다. 그에겐 이 일이 적국에 대한 전투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여러 나라에서 핵폭탄 수만 개를 만들었음에도 사용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핵이 무기지만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일 터이다. 핵 대신 그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갖는 폭탄을 만들어 사용하려는 지금 핵이든 고성능 폭탄이든 이 폭탄을 사용하는 일은 인류와 하느님께 저지르는 죄악이다. 어느 것도 더 이상 허용해선 안 된다.

우리의 평화 순례는 핵폭탄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특히나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한반도에서 이 무기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이번 순례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리고 한일의 역사 화해를 위해서도 우리의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CK는 적절한 시기에 잘 조직했다는 생각이다. 나는 앞으로도 동북아 더 나아가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순례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PCK 연구이사,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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