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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혁명의 시대를 맞는 성가정의 고민

기사승인 2019.12.19  15: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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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12월 22일(대림 제4주일) 이사 7,10-14; 로마 1,1-7; 마태 1,18-24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족 해체와 재구성을 경험하는 국가가 되었다. 서구에서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 온 인구혁명이 우리는 불과 30년 만에 전통가족 개념을 허물고 1인 가구, 비친족 가족이 1위로 등극할 전망이다. 통계청의 '2018년 출생 통계 확정'(2019.11.28)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08명으로 줄어서 인구유지에 필요한 합계출산율(대체출산율) 0명대로 떨어졌다. 이런 수치는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 “이혼, 결혼기피, 저출산, 다문화, 성소수자”에 대한 개방적 인식이 1인 가족, 한부모 가족, 동거 가족, 동성 가족, 공동체 가족 등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구가 집중하고 있는 가정사목도 이제는 가족이란 의미부터 새롭게 접근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한 지붕 밑에 사는 부모와 자녀를 ‘정상 가정’으로 규정하고 이 틀에서 벗어나는 가족들을 ‘결손’이라는 프레임으로 걸어 왔던 사고에 균열이 났다는 소리다. 소위 정상이 해체되고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로 진입하고 있다. 이 단순한 수치는 단순하지 않아서 문제다. 사회의 거대한 베이스 캠프 자체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구조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현재의 문화, 교육, 소비패턴, 가치들이 급변하고 있다. 얼마 전 탄생한 신조어, 욜로(yolo)족, 투데이(Today)족은 젊은이들의 가치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기성세대는 오늘을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했지만 젊은 세대는 지금 가진 것으로 오늘에 집중한다. 아끼고 모아서 부자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 부와 빈곤은 대물림이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소위 ‘욜로 라이프’,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인 이유도 그런 가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 역시 1인 가구,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에 중심을 둔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가톨릭이 주력하는 ‘가정’의 모델엔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룬 ‘성가정’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신화를 벗기면 성가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곧바로 드러난다. 성가정은 처음부터 우리가 그리는 그런 전통 가족의 모델이 아니었다. ‘정상적’이지 않다. 마리아의 혼전 임신은 약혼자 요셉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중대한 불법이었으며, 평생 따라다닐 스캔들이었고,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불가사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요셉이 직면했던 동정녀의 잉태 문제는 초대교회보다 과학과 합리성을 중시한 근대에 와서 혹은 개신교도들에 의해 더 시빗거리가 되었다. 이와 맞받아서 신심 깊은 가톨릭인들이 가정을 수호한 요셉과 함께 성가정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마리아와 예수는 요셉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가정의 모델이 되어 갔다. 그러나 사실 복음이 전하는 성가정은 평온한 성화 속의 이미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이사야가 예고한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태어날 아들, 임마누엘”(이사 7,14)은 보통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런 행복한 그림이 아니었다. ‘임마누엘’의 가정은 애초부터 깨어진 세상을 복구하기 위해 ‘종’이 되겠다고 나선 공동체였다. 이것이 오늘 마태오가 전하는 가족의 정체다.

예수, 마리아, 요셉으로 이루어진 성가정. (이미지 출처 = Pxfuel)

해마다 교황의 주도로 개최되는 ‘세계 가정의 날’ 미사에는 ‘온전한’ 가족에서 배제된 ‘비정상 가정’ 구성원들이 울타리 밖에 내몰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가족일 수 있게 해 달라는 그들의 절규는 ‘정상적인 가정’의 도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정으로 끊임없이 배제되고 있다. 남미 가톨릭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개신교 공동체가 급성장하는 데는 경제적인 이유 말고도 혼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만연한 빈곤과 연계된 혼전 임신, 이혼, 동거가 일상처럼 자리 잡은 그들에게 다른 기회는 없다. 그럼에도 신심 깊고 선한 이 민중들은 매일같이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에 모여든다. 그리곤 멀찌감치 앉아서 그저 성체 행렬을 지켜보고만 있다.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이런 상황이 그들 평생에 이어질 것이다. 갑자기 예수는 가난한 이들을 잔치에 초대해 놓고 빵 한 조각 주지 않는 매몰찬 집주인이 되어 버렸다. 그가 우리가 아는 예수가 맞는가? 그가 가난한 이와 죄인들, 회당에서 쫓겨난 이들과 식탁에 어울리길 좋아했던 그 사람인가? 부랑자들, 창녀들, 사기꾼(세리)들, 불경한 자들을 초대하고 그들이 먼저 하느님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선포한 그 혁명가인가? 이 자리에서 교회가 오랫동안 못박아 온 ‘혼인불가해소성’(마르 10,6-9)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울타리 밖으로 내쫓긴 부서진 사람들과 함께 예수가 들려주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일 작정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예수의 진짜 가족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교회는 이제 현실이 된 가족 혁명 앞에서 ‘진정한’ 가족에 대해 다시 재고해 볼 때다. 지난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되었던 제9차 세계가정대회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은 세상과 하느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정의와 거룩함과 평화 안에서 함께 사는 하나의 인류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장벽을 부수는 힘을 갖습니다.” 성령은 인간이 만들고 빗장을 건 감옥을 끊임없이 해체해서 해방의 영역에 도달하게 한다. 성가정이 ‘거룩한’ 이유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설정한 ‘거룩한’ 프레임을 깨는 영역에 있어서다. 인류가 오랫동안 전수한 가정이란 제도가 미래의 인류에게 납득할 수 없는 감옥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사고가 젊은이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야 한다. 이제 충분히 그래야 할 때가 왔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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