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으시오“

교종, 12월29일 성가정 축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12월2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삼종기도에서 성가정의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함께 서로를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교종은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선물을 통해 거룩해지고 또한 각자의 계획에 대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준수 때문에 나자렛 가족은 하느님의 뜻에 항상 열려 있었다고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나자렛 성가정의 성스러운 가족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성모 마리아를 봅시다. 마리아는 다른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배우자와의 깊은 친교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사명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선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을 봅시다. 그는 처음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를 비밀리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하느님의 계획에 장애가 되지 않고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사렛 성가정의 세 번째 구성원인 예수님을 봅니다. 어린시절 부모가 잃었던 예수를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며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식사를 걱정하자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4)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그분의 초기 생애 동안 너무나 많은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또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왔을 때 게쎄마니 동산에서도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42)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예수님의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요한 6,39)고 하신 말씀을 완벽하게 실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나자렛 성가정은 구성원 모두의 하느님에 뜻에 대한 ‘합창적인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 마리아, 요셉은 서로서로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실행하는 데 끝없이 도움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나자렛 성가정을 모범 삼아 부모와 자녀들은 복음을 고수하면서 서로를 지지할 수 있도록 ‘가족의 거룩함의 기초’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소말리아 테러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날 삼종기도 후 소말리아에서 사망자 90명 이상을 낸 차량폭탄 테러 피해자와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교종은 기도에서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어제 발생한 끔찍한 테러공격 피해자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시다. 그곳에서 차량폭탄 폭발로 9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저는 모든 가족과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것을 약속드리며 소말리아에 평화가 도래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 

16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차량 폭탄테러로 최소 90명이 사망하고 1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했다. 소말리아 정부는 사망자 수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파르마조 소말리아 대통령은 알카에다 무장단체가 공격의 배후에 있다고 믿는다며 ‘무서운 테러행위’라고 비난했다. 한때 소말리아의 많은 영토를 지배하던 알카에다 집단은 2011년 모가디슈에서 축출됐었다.

 

“어제와 오늘의 모든 순교자를 기억합시다”

교종,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12월2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우리 모두 어제와 오늘의 모든 순교자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유익을 중심에 두면서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자고 권고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 성인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사도 6-7장) 오늘 독서는 그가 붙잡히고 돌팔매를 맞는 생애 마지막 순간을 전해 줍니다.(사도 6,12; 7,54-60) 성탄의 즐거움을 지내는 분위기에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최초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기억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축일은 성탄의 진정한 의미와 조화를 이룹니다. 실제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에서 폭력은 사랑에게, 죽음은 생명에게 패배했음을 보여 줍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최후증언의 시간에 하늘이 열린 것을 묵상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합니다.(사도 7,60) 성령으로 충만한 이 젊은 복음의 종은 자신의 말과 생명으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을 보면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박해할 때 아버지의 영께서 너희가 증거할 수 있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고,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일러주실 것이다.”(마태 10,19-20) 

삶과 죽음에서 자신의 스승을 닮은 스테파노 성인의 학교에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충실한 증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지속되는 하늘의 영광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자신을 내어 주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배웁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에 관해 설명할 수 있도록(1베드 3,15 참조) 매일 만나는 도전과 시련을 통해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히브 12,2)이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늘은 더 이상 땅에서 분리된 먼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늘은 땅으로 내려 왔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취하여 하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증거는 바로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형성된 삶의 방식입니다. 온화하고 용감하고 겸손하고 고귀하고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스테파노는 부제였으며, 교회의 첫 일곱 봉사자 중 하나였습니다.(사도 6,1-6) 그는 우리에게 형제애와 복음적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를 선포하라고 가르칩니다. 순교로 끝난 그의 증거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쇄신을 위한 영감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모든 것을 복음화의 목표로 삼고 희망과 구원에 대한 갈증이 더 많이 있는 존재적이고 지리적인 주변부에 사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고자 결심하며, 더욱더 선교하는 공동체로 변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세속적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으며,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오직 하느님 영광과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유익을 중심에 둬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따라서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은 ‘어제와 오늘의’ 모든 순교자를 기억하고 그들과 친교를 이루며, 마음과 입술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고 죽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성탄시기를 살 수 있도록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우리를 도와주시길 청합시다. 감사합니다.

 

“인류를 더 잘 섬기기 위한 변화가 필요”

교종, 바티칸 꾸리아에 조직개편 당위성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2월21일 바티칸 클레멘스 홀에서 바티칸 공무원들과 성탄인사를 나누는 연례적인 만남에서 바티칸 꾸리아 조직개편을 위한 새로운 부서의 필요성과 목적을 거듭 강조하면서 바티칸 조직과 제도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연설 내용.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경직된 태도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비그리스도화된 세상에 복음을 더 잘 선포하기 위해 말입니다. 그동안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바티칸은 그다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데 있어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관점과 성경의 역사적 관점에서 발전과 성장을 살아가는 교회의 여정은 모두 ‘떠남과 재출발로 아로새겨진 여정’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새 성인들 중 한 분인 성 뉴먼 추기경이 “변화가 사실은 회심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던 이유입니다. 제가 교종직무 시작부터 지향했고 동반했던 신념들이란 ‘단순한 변화의 시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라는 구체적 신념입니다. 올바른 태도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두려는 안이한 타성에 빠지기보다 식별력과 용기를 갖고 현 시대의 도전이 질문을 던지도록 놓아 두는 것입니다. 새로운 옷을 걸치지만 예전처럼 현실에 머무는 데 그치면서 변화를 말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기억납니다.(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표범") 저는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바티칸의 복잡한 역사 안에서 이뤄졌던 좋은 시도들을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확고한 토대를 갖춘 미래, 뿌리가 깊어 풍요로울 수 있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역사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자기 보존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발전과정에 있는 삶과 생명력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기억은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입니다. 본질적으로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전통도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잿더미 속에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경직된 태도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깁니다. 그것은 공동선의 토양에 말뚝을 박고 장애물을 설치함으로써 혐오와 불통이 심겨진 밭으로 만듭니다. 선포하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합니다. 

2017년 말 신설된 국무원 제3부(바티칸 외교인사부)와 같이 바티칸 조직을 일부 신설하는 내용을 검토했습니다. 또한 바티칸과 개별교회의 관계와 일부 부서의 구조, 특히 동방교회를 위한 부서와 유대교와의 대화에 중점을 두는 종교간 대화와 교회일치를 위한 부서에 일어나는 변화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나 베네딕토 16세 교종시대에 분명하게 입증된 것처럼 더 이상 과거처럼 복음을 의식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전통적 부서들이 전체적으로 재구성돼야 하고 새로운 부서의 신설을 제안해야 합니다. 신앙교리성과 인류복음화성이 설립될 당시에는 그리스도인 세상과 다른 한편에는 아직 복음화해야 할 세상으로 두 세상을 구별하기가 훨씬 간단하고 충분히 정의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직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민족들은 서양이 아닌 대륙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특히 도시집중 지역에 있습니다. 이곳에는 특수사목이 필요합니다. 대도시에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조정하도록 도와주는 또 다른 ‘지도’, 또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바티칸 조직을 재편하는 것은 복음선포를 쇄신하는 데 자극이 됩니다. 제가 권고서한 ‘복음의 기쁨’에서 밝혔던 것처럼, 교회의 관습, 행동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구조는 ‘자기 보전’보다 오늘날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예전에는 서로 구분됐던 바티칸 미디어의 9개 단체를 통합한 홍보부서의 신설을 주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닌 폭넓게 디지털화된 문화 안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조화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멀티미디어와 디지털 융합이 특징인 새로운 문화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사도좌의 적절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다양화된 서비스와 비교할 때 멀티미디어 형태가 우세합니다. 이는 다양한 서비스를 인식하고 생각하며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모든 것은 문화적 변화와 함께 격리된 부서의 업무에서 인력이나 업무를 약간 조정하는 것이 최상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시너지 작용으로 이뤄지는 업무로 넘어가기 위한 제도적이고 개인적인 변화를 포함합니다. 기존 정의평화평의회와 사회복지평의회, 이주사목평의회와 보건사목평의회 간 구별된 업무를 더욱 일치되고 일관된 업무가 되도록 신설한 ‘온전한 인간발전 촉진을 위한 부서’에도 하나의 구조로 더 많은 서비스를 할 수 있는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교회는 단지 사회적 문제나 이민자들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화된 사회의 쓰고 버려진 모든 이의 상징이 되는 형제자매들, 곧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상기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느님께는 아무도 ‘이방인’이나 ‘소외된 이’가 아니라고 증거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지중해 바다가 너무도 많은 이들의 무덤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무관심에 젖은 양심을 일깨우라고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사랑은 권태를 이깁니다. 도전과 필요한 균형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 특히 바티칸이 먼저 모두 유일한 아버지 자녀인 인류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처럼 큰 변화의 어려움과 점진적 필요성 앞에서 인간적 실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실수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습니다. 이 힘겨운 역사적 과정에는 항상 과거에 굴복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과거가 더 우리를 보장해 주고, 익숙하며, 확실하고, 덜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직된 태도를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경직된 태도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깁니다. 그것은 공동선의 토양에 말뚝을 박고 장애물을 설치함으로써 혐오와 불통이 심긴 밭으로 만듭니다. 모든 경직된 태도에는 항상 불균형이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경직된 태도와 불균형은 악순환 속에서 서로를 강화합니다. 이러한 경직된 태도의 유혹은 아주 구체적인 유혹입니다. 고 마르티니 추기경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교회는 200년 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스스로를 일깨우지 않습니까? 두려워합니까?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입니까? 그러나 신앙은 교회의 기초입니다. 신앙, 신뢰, 용기 오직 사랑만이 권태를 이깁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