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월 5일(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 60,1-6; 에페 3,2.3ㄴ.5-6; 마태 2,1-12

2020년이 밝았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밝힐 해돋이를 찾아 산과 바다로 떠난다. 정확한 일출지에 발을 딛고 하늘을 물들이는 거대한 태양의 위력을 느끼면서 모두는 경건해지고 싶다. 올해는 바라는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간절히 빌기도 한다. 소망을 비는 기도는 해돋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해에 처음 맞는 보름에도 사람들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그러나 태양과 달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 과학으로 무장된 영악한 현대인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들은 태양과 달에 빈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이 광대한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신에게 빈 것이다. 거대한 일출을 통해 신의 위대함에 압도되는 것이다. 압도된 인간은 절로 경건해지고, 절로 자신이 보잘것없으며, 자신이 욕망했던 ‘꿈’들이란 게 갑자기 시시해짐을 체험한다. 그래서 해마다 한 번쯤은 웅대한 대자연에 혼을 빼앗긴 채 인간이란 존재의 덧없음을, 죽자 사자 내달렸던 무간지옥을 털어내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홀연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흔연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싶은 거다. 이것이 며칠 버티지 못할 희망 사항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해마다 의식처럼 이 예를 치르는 진짜 이유는 찰나만이라도 살아 있는 진짜 제 자신이 되고 싶어서일 게다.

동방박사들의 여정이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별’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 끝까지 그 별을 따라갔다는 점일 것이다. 메시아의 탄생지로 안내한 위대한 별의 이야기는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자기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시작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류의 이야기기도 하고, 자기 여정 중에 부닥친 특별한 개인의 이야기기도 하며, 실패했다고 낙담했을 때 발견한 구원의 이야기기도 하다. 인생에서 만난 별은 네비게이션처럼 정확한 목적지를 안내하지는 않는다. 모든 인생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 속으로 흔들리면서 별을 따라간다. 그 여정 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헤로데 궁 언저리를 헤맬 수도 있고, 별이 멈추어 선 곳에서 뜻하지 않은 아기를 마주칠 수도 있다. 아기를 마주친 곳은 여행의 완성인 동시에 전혀 다른 여행의 시작을 뜻한다. 나그네들은 일어나 다시 거쳐 온 만큼의 여정을 떠나야 하겠지만, 다시 별을 놓칠까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들 자신이 별이 되었기 때문이다.

별을 찾아 떠난 동방박사들. (이미지 출처 = publicdomainpictures.net)

공현 대축일, 동방박사들이 알리는 이 짧고 독특한 이야기는 ‘일어나’(이사 60,1-6) 걸어간 자들이 획득한 기쁜 소식에 관한 이야기다. 뜻을 가진 사람들이 걷기 시작할 때 별은 따라서 움직이고, 별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길’이 될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별이 뿜는 빛을 밟으며 걷는 사람들, 그들이 낸 길이 벌써 이천이십여 년 이어져 내려왔다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난다. 움직이지 않고 내딛지 않는 사람, 모든 걸 사유화하고 이익을 좇는 사람은 걷는 자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만드는 자다. 그것도 제 인생의 여정이라 주장하겠지만 그들에게 별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별이 오랜 시간 율법과 경전을 공부하고, 예수가 태어날 곳을 미리 알고 있던 지식인들, 제단과 신이 저희들 것인 양 수중에 가둔 사제들, 부와 권력을 향유한 왕과 귀족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들은 움직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알아서 별이 찾아올 것이고, 알아서 자신들을 비출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달리 별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비록 별을 따라나선 순례자들이 왕의 탄생지를 예루살렘 도성으로, 헤로데 궁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오판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거짓 전언을 한 것이 전부였다: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지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고도의 성읍이다. 그러나 도성은 움직이지 않는 자들이 장악한 욕망과 독선, 아집의 성지로 화했다. 헤로데는 자기 왕권을 내줘야 하는 절체절명의 문제로 부심했고, 고위급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메시아’가 이방인과 연루된 자체를 부정했다. 구원은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매번 이런 인간의 예상을 빗나갔다. 메시아의 귀환을 맞을 자격은 유대 전통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왕의 탄생에 경배드린 자들이 목동과 먼 곳에서 별을 따라온 이방인들에게 주어졌다고 알리지 않는가.

우리는 가끔씩 자신의 여정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동방의 현인들처럼 오랜 인생의 여정을 걸어온 사람들은 잘 안다. 별은 나의 꿈과 이상을 배반한다는 것을, 별은 나의 기대와 어긋나는 곳, 너무 하찮아서 지나쳤던 곳, 하필 실패한 그곳에 멈추어 선다는 것을. 전혀 특별하지 않은 곳(작은 고을 베들레헴),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촌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설마 하는 곳(동물들의 헛간) 위에서 멈추어 선다는 것을. 성경은 “임마누엘”을 통해 그렇게 계시했다. 그 헛간엔 그 헛간에 어울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던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낭패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보다시피 우리가 걷기로 한 신앙의 여정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어떤 논리적 연결고리도 없다. 신앙의 길은 결국, 내가 신봉해 온 ‘믿음’에 대한 전면 도전이며, ‘별’이라고 믿었던 거짓과 환상에서 깨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해엔 가끔씩 내가 좇는 별의 정체에 대해 의심해 볼 일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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