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선종, 독일인 평신도 활동가 한마리아 여사 추모회

한마리아(Maria Sailer) 여사를 위한 위령미사와 추모회가 열렸다.

향년 80살로 지난 12월 13일 선종한 한마리아 여사는 30년간(1965-94) 한국에 살며 농촌 농민, 여성, 협동조합 운동에 헌신한 독일 평신도 활동가다.

1965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농촌사목과 여권 신장에 헌신한 한 마리아 선생은 지난 12월 13일 독일에서 선종했다. (사진 제공 = 가톨릭농민회)

한마리아는 1939년 독일 남부 하팅에서 태어나 1964년 뮌헨 공과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농민회의 전신인 가톨릭농촌청년회에서 국제대외업무를 맡기 위해 1965년 한국에 왔다. 당시 26살이던 그는 1984년까지 가톨릭농민회 국제부장과 여성부장으로 농민, 여성운동 현장에서 활동했다.

"시골길이 좁고, 도시에는 상점보다 간판이 크고, 여성들의 치마저고리가 참 인상적입니다. 독일에서는 식물원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은행나무를 한국에선 어디서나 구경할 수 있고, 더욱이나 초가집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만약 독일에서 한국 사람들을 못 만났으면 아프리카로 갔을 겁니다."("가톨릭농민회 50년사1", 가톨릭농민회, 2017)

한국에 온 지 3년쯤 된 해인 1968년 <농촌청년> 창간호에 실린 한마리아의 글이다. 가톨릭 농민 운동사에 기록된 "20대, 30대, 40대에 걸쳐 한국 가톨릭농민회에 근무하면서 희생적 봉사를 한 보기 드문 외국 여성이었다."

그는 한국 농민단체에 대한 국제 지원, 서독 농촌청년운동 시찰, 국제 가톨릭농촌청년회와 교황청 산하 국제 가톨릭농촌단체 협의회 가입 등 경제적 지원과 국제적 연대를 추진했다.

이날 미사 뒤 열린 추모회에서는 한마리아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이들이 회고담을 나눴다. ⓒ김수나 기자

함평고구마 사건(1977), 춘천 농민회 사건(1978), 안동 오원춘 사건(1979), 광주민주화 항쟁(1980), 미문화원 방화 사건(1982) 등 농민, 민주화 단체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이어지던 시기 추방위협을 당하면서도 그는 한국의 농촌을 지켰다. 

1984년 가톨릭농민회를 나와 1994년 12월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는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한국 주재원으로 일하며 신협, 한국여성민우회, 여성 사회교육원 등을 국제,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귀국 뒤에는 고향 레겐스부르크 공소회장을 지내며 제3세계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8일 대전교구 대철회관에서 봉헌된 위령미사는 두봉 주교(초대 안동교구장)가 주례하고, 가톨릭농민회 초대 지도사제인 이종창 신부(마산교구), 역대 교구 지도 사제인 나기순 신부(대전교구), 곽동철 신부(청주교구), 문규현 신부(전주교구), 이영선 신부(광주교구), 최기식(원주교구)가 공동 집전했다.

이날 미사 강론에서 두봉 주교는 “우리는 살다 모두 그 나라로 돌아갈 사람이다. 주님이 부르시면 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라며 “주님을 모시고 세상을 떠나면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주님 말씀대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살다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봉 주교는 이어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하고, 명복을 빈다고 하잖나. 명은 저승, 복은 행복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지 못했어도 돌아가서는 행복하라는 바람”이라며 “한마리아도 하늘나라에 갔다고 확신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갈 것이다. 이왕이면 그리스도인답게 떳떳하게 하느님을 모시고 멋진 삶을 살다 주님이 부르실 때 기꺼이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미사를 주례한 두봉 주교. 두봉 주교는 초대 안동교구장(1969-90)으로, 가톨릭농민회가 농촌사목과 정의평화 운동을 펼치던 시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김수나 기자

미사 뒤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역대 지도사제와 회장단, 인성회, 광주, 대구, 대전, 마산, 수원, 안동, 원주, 전주, 청주, 춘천교구 가톨릭농민회 등 교회 단체와 신협, 한살림, 여성계 등 관련 단체 인사가 참석한 추모회에서 한마리아 여사와 함께했던 이들의 회고담이 이어졌다.

이길재 초대 가농 회장은 이번 추모회를 열게 된 배경에 대해 “한마리아 여사의 선종 소식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한 여사의 오랜 친구인 염희영 씨(실비아, 소설가 염상섭 차녀)에게 전해 듣고, 장례에 가지 못한 안타까움과 그를 기억하기 위해 이날 추모회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 전 회장은 “1999년 11월 농민의 날에 한마리아 선생은 산업훈장을 받았고 축하를 겸해 환갑잔치를 했다. 2009년에는 명동에서 칠순잔치를 했고, 지난해 팔순잔치를 해 드리려고 했는데, 노환으로 한국까지 오시지 못해 만날 날을 기다리던 가운데 먼저 가셨다”고 말했다.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정현찬 회장은 “한마리아 선생은 우리의 스승이자 투쟁의 현장에서는 우리의 동지였다”며 “군사독재 정권에서 억압받던 암울한 시대에 선생과 함께 투쟁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더 그립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마리아 선생은 이 땅의 농민운동을 활성화한 분, 군부독재 때 곁에서 힘이 돼 준 분, 가난하고 어려울 때 재정지원을 해 준 분”이라며 “그분이 없었다면 한국 농민의 삶이 지금처럼 성장했을까, 선생은 떠나셨지만 늘 한국 농민의 가슴에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미사와 추모회에는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역대 회장단과 지도사제, 각 교구 가톨릭농민회와 외부 인사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김수나 기자

여성계를 대표해 김주숙 전 한신대 교수는 “한마리아는 가톨릭농민회를 나온 뒤인 1990년대에 여성계를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한국 여성 지도자 대부분이 마리아 덕을 봤다”고 말했다.

김 전 교수는 “마리아 선생이 아데나워 재단에서 일하면서 한국 여성들이 독일 연수를 가도록 해 줬다. 덕분에 당시 진보적 운동을 하던 여성들이 독일의 사회활동, 여성계, 지방자치, 행정을 공부하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다양한 연구비도 지원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마리아는 여성농민의 능력 개발과 의식화, 여성농민 조직화를 통해 여성이 농촌문제 해결과 농촌 민주화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지원했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일깨웠다.

특히 1972년 가톨릭농촌청년회가 가톨릭농민회로 개편된 뒤 6년이 지나서도 여성 사업을 전담하는 부서가 없어 여성 활동이 단발에 그쳤지만, 한마리아 등이 중심이 돼 부녀부를 만들어 여성을 위한 구체적 활동을 펼칠 여건을 마련해 냈다.

이에 대해 “가톨릭농민회 50년사”는 “당시 사회 전반은 물론 민주화 운동계에서도 여성운동에 대한 이해가 낮았던 현실”에서 가톨릭농민회 부녀부 설치는 여성을 위한 구체적 활동을 펼칠 바탕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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