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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

기사승인 2020.01.16  14: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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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1월 19일(연중 제2주일) 이사 49,3-6; 1코린 1,1-3; 요한 1,29-34

사람마다 이해도가 다르다. 그래서 단둘이 얼굴을 맞대고 주고받은 이야기도 돌아서서 나오면 다른 이야기로 둔갑해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너에게로 건너가는 길은 강을 건너는 것만큼 모험적인 일이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아예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단정해 말했다. 처음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 관계 불능자인가 하고 오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불가능이라는 언어가 존재의 신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뭇사람들이 쉽게 ‘너’를, 그리고 ‘나’를 안다고, 아주 잘 안다고 말할 때 ‘아니오’ 하고 선을 그은 것이고, 그 도달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의 글을 대할 때 자주 이런 벽을 실감하게 된다. 잘 안다고 생각한 그의 언어는 일순 모습을 감추고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는 자체가 살아 있는 존재다. 요한의 체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가 한 말은 침묵이거나 부재다. 그를 만나면서도 만날 때마다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은 건널 수 없는 불가능이어서가 아니다. 대할 때마다 새로운 얼굴로 나타나 또 다른 영역으로 데려가는 그 ‘낯설음’ 때문이다. 그를 만난 과거가 뻔할 만큼 익숙해지지 않아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너를 잘 안다는 것은, 이제 내가 너를 장악할 수 있다는 말 외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네가 내 손에 쥐어졌다는 소리고, 다시 너란 존재에 대해 느낄 감동이 남아 있지 않다는 소리다. 존재를 잇는 ‘관계’는 묶는 것이 아니다. 서로 풀려진 채 이어 있는 것,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만큼의 거리와 여백을 남기는 것이다.

세상과 삶을 대하는 방식은 고스란히 복음을 대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만나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 연결고리 두 개가 없다면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로 세상을 통과할 것이다. 요한사가가 전하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두 번씩이나 자신이 “처음부터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자”(요한 1,31.33)였다고 고백한다. 예수를 알고는 있었으나 안 것이 아니었다. 오늘 복음의 짧은 다섯 절에는 세자 요한이 알아본 예수의 정체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매번 다른 얼굴로, 다른 체험으로, 친숙하나 낯선 자로 만났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었다가, “나보다 앞서 존재하신 분”으로, 혹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세자 요한이 마침내 예수의 존재를 정점에 세운 것은 다음과 같은 외마디를 통해서였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예수를 알아본 세례자 요한.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요한사가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아본’ 자의 기쁨이고, 그것을 증언하는 데 전력을 다한 자의 이야기다. 지금은 예수와 관련된 논문이나 책자가 엄청나서, 무신론자도 예수와 관련된 이야기쯤은 교양이 되었지만 당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수의 처형 사건은 유대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실 예수가 다시 소생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부활사건을 증언한 여인들이나 몇몇 제자들의 소리는 맹신적 광신도들이 떠드는 헛소리쯤으로 여겼다. 상황이 최악으로 나빠져 있을 때 요한은 세자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가를 고백했다. 비록 세자 요한이 헤로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와 예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극과 극이었다. 이미 세자 요한을 위대한 예언자로 알고 있던 대중은 세자 요한을 부도덕한 헤로데의 손에 죽은 의인으로 여겼지만, 예수는 사제와 율법학자, 경건한 바리사이들에 의해 단죄된 유대 사회의 범법자였다. 그러니 오늘 세자 요한이 전하는 예수에 대한 ‘증언’은 자기 사활을 건 증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린다는 것, 내가 그 증인이며, 추종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은 ‘(혐오적?)소수자’의 커밍아웃보다 더 위험했다.

이것은 오늘 고도로 발달된 문명 세계라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를 증언한다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그가 우리의 인식을 초월한 신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를 더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다. 그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일이어서다. 교회가 오랜 박해의 시기를 끝내고 ‘제국주의’에 투항한 이후 신자 수가 폭발한 것은 전부를 잃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예수는 점점 더 우리 편하자는 대로 편한 신이 되어 갔다. 이제 그를 따르는 자들은 더는 위험하지 않아도 좋다.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묻게 하였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2)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오랜 지인이던 예수에 관해 더 알고 싶은 정보가 남아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예수의 ‘메시아성’이었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하느님나라가 곧 임박했다는 것이고, 이제 세계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세계의 질서 재편은 메시아를 중심으로 완전히 뒤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세자 요한의 질문에 예수는 그들을 설득할 만한 어떤 특이점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중략)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3-6)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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