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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1월 14-16일)

기사승인 2020.01.17  14: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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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하느님을 움직이는 작은 기도”

교종, 1월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이날 복음(마르 1,40-45)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화를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고 말했다. 

강론 내용.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어떻게 접근했는지 보여 줍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이런 나병환자의 요청은 간단한 기도며, 신뢰의 행위요, 진정한 도전입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는 간청이며, 또한 예수님과 우리에 대한 그분의 동정심에 관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며 다른 사람들 고통을 당신 자신에게 맡기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아버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고치십니다. 나병환자 간청 가운데 "하시고자 하시면"이란 문구는 하느님의 주목을 받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도전이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을 그분께 맡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병환자가 이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을 보았습니다. 동정심은 복음에 나인의 과부 이야기와 선한 사마리아인과 탕자의 비유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동정심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참여하게 되며, 무언가를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또 동정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고 치유하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전파하러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심으로 즉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은 그분을 정확하게 십자가로 인도하여 그분의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표현은 우리들이 매일 사용할 수 있는 기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문구를 자주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원하시면 저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또는 “당신이 원하시면 그것을 더 오래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하루에 여러 번 말할 수 있는 간단한 기도.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하루에 여러 번 속으로 “주님,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실 수 있다면 저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소서.” 이것을 반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자신을 참여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몇 번 설교하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으며 항상 우리 편에 계십니다. 나병환자의 단순하고도 기적적인 기도로 나병 환자는 우리의 죄악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동정심 덕분에 치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를 위해 오셨으며, 당신을 위해 가장 큰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 큰 죄인일수록 주님은 더 가까이 계십니다. 나를 위해, 가장 큰 죄인인 우리 모두를 위해. 항상 이 기도를 반복하는 습관을 갖도록 합시다. “주님, 원하시면 당신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을 갖고 그리고 그분의 동정심에 우리를 맡기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문제, 우리의 죄, 우리의 내적 질병, 모든 것을 당신 자신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교회는 박해와 오해 속에서도 지치지 않는다”

교종, 1월15일 수요 일반접견 사도행전 마지막 교육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15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 사도행전 교리교육 마지막 부분을 마치면서 교회가 박해를 받더라도 어지신 어머니의 마음을 간직하는 일에 지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성 바오로 사도와 함께한 복음여행은 믿음으로 살면 사람의 여행이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교통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지난해 5월 말부터 시작된 사도행전 교리교육을 마치게 되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 전도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로마에서의 내용을 끝으로 그동안의 사도행전 교리교육을 마치겠습니다. 복음의 여정과 하나가 된 바오로 사도의 여정은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살 때 삶의 여정이 하느님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의 왕성한 누룩이자 상황들을 변화시키고 언제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신앙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국의 중심에 도착하면서 사도행전 이야기는 끝납니다. 바오로 사도의 순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말씀의 풍요로운 선포로 끝납니다. 세상에서의 복음의 여정에 중점을 둔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사도행전 끝부분은 하느님 말씀의 온갖 역동성을 포함하고 요약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전하기 위해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을 그칠 수 없습니다. 

로마에서 사도 바오로는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환대하고 용기를 심어 주는 형제들을 만납니다.(사도 28,15 참조) 이 만남에서 보여 준 환대는 그들이 바오로의 도착을 얼마나 기다리고 열망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바오로는 군사의 감시 하에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곧, 자신을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것입니다. 가택연금이죠. 죄수 신분임에도 바오로는 왜 카이사르(황제)에게 상소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나라에 대해 말하기 위해 유대인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성경에서 시작해 그리스도의 새로움과 ‘이스라엘의 희망’(사도 28,20)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에 관해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유대인임을 인식하면서 복음 안에서 그가 전파하는 분, 곧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좋은 호응이 있었던 비공식적 첫 모임이 끝난 뒤 공식 모임이 마련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어진 모임에서 바오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을 들어(사도 28,23) 설득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오로의 말에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는 심판의 원인이 되는 하느님 백성의 무뎌진 마음을 질책했습니다.(이사 6,9-10) 이어 그는 하느님께 민감하고 생명의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민족들의 구원에 관해 열정적으로 설명합니다.(사도 28,28) 이 시점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의 죽음이 아니라 바오로의 설교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2티모 2,9) 말씀의 역동성을 보여 주면서 사도행전 집필을 마칩니다. 바오로는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는 없었지만 하느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으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손으로 뿌려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하느님나라의 선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알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아 자신의 셋집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사도 28,31) 하느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이 셋집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비록 박해 받고 오해 받고 감옥에 갇혀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선포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모성의 마음으로 환대하는 지치지 않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 안에서 복음의 여정을 따라 함께했던 사도행전에 대한 교리교육 여정을 마치면서, 우리 각자 용감하고 기뻐하는 복음 전파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새롭게 해 주시길 성령께 청합시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우리 가정을 복음으로 충만하게 할 수 있길 청합시다. 우리 가정이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 안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환대하는 형제애의 다락방이 되게 해 주시길 청합시다.

 

“권위는 명령이 아닌 일관성과 증거”

교종, 1월14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14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의 참된 권위와 주님의 방식에서 멀어지며 증거의 삶을 살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사목자들과 일관성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악을 저지르는가를 설명했다. 교종은 하느님의 백성은 일관성 없는 사목자를 너그럽게 참아 주지만 위선의 이면을 분별할 줄 아는 온유하고, 현명한 백성들이라고 말했다. 

강론 내용.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21ㄴ-28)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행동하시는 그분의 방식이 사람들에게 일으킨 반응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처럼 ‘내적 권위’를 가지는 것과 율법학자들처럼 권위가 없으면서도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정반대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말은 들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품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권위는 무엇입니까? 곧 주님의 방식입니다. 몸소 움직이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경청하시는 말하자면 지도력입니다. 이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품위 있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일관성입니다. 예수님은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가르치신 것과 행하신 것이 일관적이었고 삶의 방식이 일관적이었습니다. 일관성 있는 행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을 표현해 줍니다. “이 사람은 일관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권위가 있습니다.” 즉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권위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곧 일관성과 증거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말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목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일관적이지 않은 율법학자들과 관련해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말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 23,3 참조)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의 여러 사화에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으며 반응하시고 그들에게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시며, 어떤 때는 그들을 평가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목적 조현병’에 걸렸기 때문에 말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전혀 딴판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일관성, 이렇게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 행동을 평가하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단어는 바로 ‘위선’입니다. 그들을 평가하면서 후렴구처럼 반복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을 읽어 봅시다.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니 너희 위선자들아.” “이렇게 하면서 기도는 길게 하니 너희 위선자들아, 위선자들아”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이란 사람들에 대해 책임, 이 경우 사목적 책임을 맡았지만 일관적이지 않고, 지도력도 없으며 권위도 없는 이들의 행동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느님 백성은 온유하고 너그럽습니다. 일관성 없이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수많은 위선적 사목자,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 수많은 사목자를 너그럽게 참아 줍니다. 일관성 없는 그리스도인은 스캔들입니다. 그토록 너그럽게 참아 주는 하느님 백성도 은총의 힘을 식별할 줄 압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연로한 엘리 사제는 모든 권위를 잃고 단지 도유의 은총만 남았으며, 그 은총으로 어머니가 되기 위해 기도하며 고통에 지친 한나를 축복하고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누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도유의 은총을 받았는지 잘 식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 사람에게 고해성사하러 가는데 그 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저에게 성사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네.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율법학자 같은 사목자들, 일관되지 못한 수많은 사목자,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러 가지만 나중에는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수없이 너그럽게 보아 주는 우리 백성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행동은 스캔들이고, 일관성 없는 행동입니다.” 증거하지 않고 일관성 없는 그리스도인들, 증거하지 못하는 사목자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목자들이 얼마나 많은 악을 저지르는지요! 

오늘 묵상은 주님께 기도 드리는 기회를 줍니다.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권위란 명령하거나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관성 있는 것,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에서 여정의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종에게 순명하며 사제 독신에 기여”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 사제직에 관한 저서 출간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과 경신성사성 장관 로베르 사라 추기경은 1월15일 프랑스에서 출간한 저서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여러 차례 언급했던 ‘자녀다운 순명과 사제 독신에 대한 주제를 다뤘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에 따르면 이 책 저자들은 기혼 남성을 사제로 서품하는 가능성과 독신생활에 관한 논쟁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일치를 위한 사랑의 정신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자녀다운 순명을 하는 인물들로 알려진 두 사람, 곧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과 로베르 사라 추기경은 독신제를 옹호하고 이를 바꾸지 않도록 근거를 제시한다. 175쪽에 달하는 이 책은 독신에 대한 문제를 두 글을 통해 다루고 있다. 하나는 전임 교종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 추기경 글이다. 두 사람 모두 서론과 결론에 함께 서명했다. 

사라 추기경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제직과 독신생활은 존재론적, 성사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연결을 어떤 식으로든 약화시킨다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도권뿐 아니라 성 바오로 6세, 성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의 교도권까지 문제 삼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비록 한 지역이나 다른 지역에 국한된 일일지라도 사제독신에 관한 규범을 어떤 식으로든 약화시키는 일을 금지하면서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확고하게 지켜 주길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호소한다." 사라 추기경은 기혼 남성을 사제로 서품하는 예외적 가능성을 가리켜 사목적 재앙, 교회론적 혼동, 사제직에 대한 몽매라고 정의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종은 짧은 글을 통해 이 주제를 성찰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유대교적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사제직과 독신이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새 계약’부터 결합된 것이며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초대교회, 다시 말해 교회창설 이후 초기 1000년 동안 기혼 남성들은 단지 성적 금욕을 존중하는 의무를 지킬 경우 신품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제독신 문제는 교의신학(도그마)이 아니며 교의신학이었던 적도 없었다. 그것은 소중한 선물을 표현하는 라틴교회의 성직 제도를 말하는 것이며, 최근의 모든 교종이 이런 식으로 정의를 내렸다. 동방 가톨릭교회는 기혼 남성들을 사제로 서품하는 가능성을 허용했으며, 라틴교회도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종이 서명한 ‘성공회 신자단체’에 예외를 인정했다. 이 교종령은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요청하는 영국 성공회 신자들에게 할애된 것으로 성좌가 인정한 객관적 기준에 따라 사안별로 기혼 남자들을 사제품에 받아들이기 위한 청원을 교종에게 할 수 있다(베네딕토 16세 교종, ‘성공회 신자단체’ 제6조 2항)고 규정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여러 차례 언급했던 이 주제를 떠올려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가 추기경이었을 때 랍비 아브라함 스코르카와의 대담을 실은 책에서 “지난 10세기가 잘못된 경험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인 경험이었기에 찬성론자들과 반대론자들과 더불어” 독신제 유지를 호의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해 1월 파나마에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동방 가톨릭교회에선 부제 이전에 독신생활 혹은 혼인생활을 선택할 수 있지만 라틴 교회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성 바오로 6세 교종님의 이런 구절이 떠오릅니다. ‘독신제 법규를 바꾸느니 목숨을 내놓겠다.’ 제 마음에 떠올라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1968년이나 1970년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순간에 하신 용기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독신이 교회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택적 독신을 허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기자들에게 답변하는 가운데 교종은 태평양의 섬들처럼 흩어진 지역들을 위한 특례를 허용하는 가능성과 관련해 신학자들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다음을 분명히 했다. 

“제가 내리는 결정이 아닙니다. 저의 결정은 이런 것입니다. 부제 이전 선택적 독신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 의견입니다만,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제가 ‘꽉 막힌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가지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10월 아마존 주교 시노드가 개최됐고 그 주제가 논의됐다. 최종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 기혼자 종신부제들을 사제로 서품하는 가능성을 요청한 주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10월26일 최종연설에서 교종이 회의실에서 모든 강연과 토론을 들은 다음, 기혼남성들의 사제서품에 대한 주제를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잊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교종은 시노드의 네 가지 차원을 떠올렸다. 곧 토착화, 생태, 사회 그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사목적 차원이었다. 

교종은 최종연설에서 새로운 직무에서 창의성에 대해 그리고 여성의 역할에 대해 말했고, 특정 선교지의 성직자 결핍 문제를 언급하면서 어떤 나라의 수많은 사제가 선진국, 곧 미국과 유럽에는 파견되지만 아마존 지역에 파견하기 위해 지원하는 사제가 그 나라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교종은 끝으로 최종보고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언론에 감사를 표했다. 곧, 언론이 최종보고서를 알리면서 문화적 진단, 사회적 진단, 사목적 진단, 생태적 진단 등 무엇보다 시노드를 정말로 잘 표현한 부분을 다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 교종은 규율문제나 다른 문제에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지 특히 어떤 분파가 승리하고 어떤 분파가 패배하는지에만 주목하는 위험에 빠지지 말자고 초대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장기풍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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