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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에서 엿본 희망

기사승인 2020.01.23  12: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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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살에 읽는 사회교리] 카렌 마을에서 읽은 '찬미받으소서'

지난 연말을 타이에서 보냈다. 치앙마이에서도 두어 시간 흙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타이와 미얀마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 카렌족 마을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청년들과 함께한 캠프의 일환이었고, 나는 미얀마에서 온 청년 한 명과 마을 가장 꼭대기, 산 위에 있는 작은 나무집에서 사흘간 홈스테이를 했다.

마을에는 전기가 없었다. 와이파이는 물론이고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아 가지고 간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었다. 홈스테이를 위해 마을 곳곳으로 흩어진 청년들은 서로를 만나고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친구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이웃들은 스스럼없이 서로의 집을 오갔다. 오래전에 마을에 닿은 선교사들이 지은 성당이 마을의 중심이었고 주민들은 아침 7시면 성당에 모여 함께 기도했다. 성당에 가는 주일에도 나의 호스트 가족은 몇 번이나 이웃집을 들러 우리를 소개했다.

닭과 돼지와 소와 개, 고양이는 마당과 마을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닭들은 종종 집 마루에도 올라와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훠이’ 쫓아내야 했다. 사람과 닭, 개와 고양이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동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마도 그곳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었기에 나 또한 내 옆에 모여드는 동물들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새벽마다 닭들이 울어 잠에서 깨고, 해가 지면 빛 한 점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잠드는 며칠이었다.

아파트에서만 자란 나에게는 말로만 듣던 전원생활이며 진정 자연과 더불어 사는 며칠이었다. 호스트 가족을 따라 오전에는 나물을 따러 가고 오후에는 물고기를 잡아 왔다. 직접 채취한 나물로 점심을 해 먹고 사냥한 물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었다. 물론 가끔은 마당에 함께 살던 동물 친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셋째 날 저녁상에 오른 치킨 수프는 손대지 못했지만, 다음 날 열린 바비큐 파티에서는 (돼지를 위해 기도하며) 삼겹살 몇 점을 집어 먹었다. 우리를 대접하고자 귀한 돼지를 잡은 호스트 가족에 대한 예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서울에서 돼지며 닭을 개의치 않고 먹던 내가 새삼스럽게 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그들의 삶을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동물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호스트 가족의 집. ⓒ정다빈

물론 자연 그 자체,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침마다 닭들은 왜 그렇게 울어 대는 것일까? 나는 새벽녘 잠을 뒤척이며 매번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아침은 온다’라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닭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어 본 사람만이 이런 명언을 낳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마당을 산책하던 돼지가 호스트 가족들의 손에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갑작스러운 돼지의 죽음은 우리 때문이 아닌가! 남겨진 아기 돼지의 운명이 가엽기도 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없었다. 당연히 휴지도 없었다. 대신 큰 물통과 바가지가 있었다. 볼일이 끝나면 바가지로 물을 떠 손으로 뒤처리를 한다. 자연 속에 머무는 평온함 만큼이나 불편함은 계속 마음 한곳에 머물렀다.

마을에 도착한 첫날 밤 폭우가 내렸다. 지붕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기도하게 되는 심한 폭우였고 우박도 지붕을 두드렸다. 12월 말 타이는 건기로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시기다. 그러나 근년에는 부쩍 건기에 비가 내리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자연에서 직접 먹을 것을 얻고 대다수의 주민이 특별한 운송수단 없이 살아가는 카렌 마을에서 기후 변화는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당장 마을에 잠시 머문 우리도 폭우가 내린 다음 날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 머물러야 했다. 이웃 마을로 성탄 미사를 드리러 가는 계획은 밤새 내린 비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낚시를 가려 했던 계획은 강물이 불어나 갈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 48항에서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일상생활의 체험과 과학 연구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경 훼손의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는 것을 보여 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마을 사람들의 체험을 나누며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기후 변화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재원이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폭우와 폭염은 견디기 어려운 불편함과 고통이다. 더욱 부당한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이야말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이라는 것이다.

벌레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카렌 마을 아이. ⓒ정다빈

마을에서 지내는 며칠간 나는 자주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자고 외쳤지만, 실상은 나 자신의 일상에 영향을 주는 어떤 불편함도 거부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마을에서는 기꺼이 마을 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했지만 서울에서도 이렇게 살 수 있는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려웠다. 어떤 쓰레기도 만들지 않고 살아가는 마을의 삶에 경도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도시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짧은 체험 끝에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온 날, 나는 캔맥주를 들이켜고 휴지가 있는 화장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한 가지 내게 남은 것은 앞으로 카렌 마을의 사람들과 내가 자연의 순환 안에 얼마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잊지 않고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더불어 도시의 삶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을 닮아 가겠다는 다짐이다. 함께 마을 체험을 다녀온 친구 중 하나는 마을에서의 삶을 ‘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전기가 없고 마트가 없는 삶은 어쩌면 개발되지 못한 낙후함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마을의 삶은 급격한 기후변화로 멸종위기에 처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졌다.

‘찬미받으소서’는 지속적 변화를 이루는 공동체의 생태적 회개와 함께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리는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독려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곧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때때로 환경운동마저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볼 때가 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발전과 번영의 논리는 재생에너지로, 대안적 삶으로, 채식으로 또 다른 소비를 부추기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진 “절제를 통하여 성숙해지고 적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능력”은 곧 긴 전통에도 가장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대안으로 느껴진다. 마치 전기도 소비도 쓰레기도 없는 카렌 마을의 삶이 생태적 재앙에 직면한 우리의 미래를 발견하는 ‘오래된 미래’인 것처럼.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마을 청년들. ⓒ정다빈

정다빈(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대학에서는 예술경영과 영상이론을, 대학원에서는 법을 공부했다.
인간 존엄성이 어떠한 논리로도 훼손되지 않는 세상, 모든 인간의 다름이 그대로 인정받는 공동체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 위에 싹트는 평화를 위해 오늘도 일하고 읽고 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정다빈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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