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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이 된 정체성 그리고 완장정치

기사승인 2020.02.10  16: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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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정치 3]

20여 년 전이다. 제법 오래 유럽에 체류하던 중 로마에 갈 일이 있었다. 숙소를 구하다 한인 숙소에 묵기로 했다. 당시 청년들의 배낭여행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들이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기웃거려 볼 심산이었다.

한 숙소와 연락이 되었고 로마역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 남성 분이 다가와서 숙소 구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네 집이 한인 숙소라고 했다. 내가 예약한 분인가 싶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아니란다. 어느 집에 묵냐고 해서 묵기로 한 숙소 전화번호를 보여 주니 실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이. 거긴 한인숙소 아니에요. 조선족이 하는 곳입니다.”

당시 그 말은 대단히 신기한 말이었다. 그때까지는 한국에서 조선인을 한국인과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난 분들이며 중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재중 교포’라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고생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잘 대해 줘야 한다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더 강한 듯 보였다.

여행이 끝나고 난 다음 영국에서 유학하며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던 선배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선배는 영국의 교포 사회에서 이미 슬금슬금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영국에서도 과거에는 조선족 분들의 숫자가 별로 없었기에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단다.

그런데 점차 미등록 이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한인 민박을 여기저기서 하기 시작하면서 마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족들이 하는 민박은 가격은 약간 저렴한 반면, 밥이나 반찬은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내가 묵었던 로마의 숙소도 그랬다. 로마역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거기 진짜 한국 음식 아니에요. 조선족식이지. 우린 김치를 먹어도 진짜 한국 김치를 먹어야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지금 한국 정부는 후베이성에 지난 14일간 머물렀던 모든 사람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모든 중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더 강경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자국민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 목소리들 사이에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금지한다면 사실 ‘국적’이나 ‘인종적 정체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후베이성에 머물렀는가, 아닌가만 따지면 된다. 더 확장하면 중국에 체류했는가, 안 했는가만 따지면 된다. 이 점 때문에 입국을 통제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국적과 상관없이 비시민권자는 입국 금지, 자국 시민권자는 입국 후 14일간 격리하는 정책을 편다.

그런데 그 ‘격리’에 대한 이야기에 반드시 ‘조선족’을 끼워서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족은 조선족이지 재중동포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족은 조선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조선족 역시 모두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월 27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국민청원에 30만 명 이상이 중국인 입국 금지에 서명했다. (사진 출처 = 유튜브 연합뉴스 채널 동영상 갈무리)

어느샌가 조선족은 더는 한국‘인’과 같은 동포, 즉 같은 민족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동포라고 하면 같은 민족을 의미한다. 인종적 ‘동일성’을 더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권리의 문제에서도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와 같은 동포이기 때문에 한국 시민권자와 비슷한 권리를 한국 정부로부터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재중동포인 한국‘인’으로서의 조선족은 한국 시민권자에 준하는 권리를 다른 ‘외국인’과 달리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부정이 그들이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이해야 한다. 사실 어느 나라라고 하더라도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를 완전히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적 권리에서부터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비용의 문제, 정치적 권력의 제한 등 여러 문제들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혐오와 차별 담론에서 조선족의 권리를 부정하는 방식은 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동포이지만 비시민권자라는 것에 있지 않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한국인과 별개의 조선족일 뿐이며 조선족은 사실상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즉 한국 ‘시민권자’가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인과 같은 민족도 아닌 ‘주제에’ 건강보험에 구멍을 내고 한국 시민권자들의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라고 격렬히 비난받는다. (이 이야기는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외국인 직장가입의 경우 건강보험에서 낸 것보다 훨씬 더 적게 건강보험을 사용한다. 지역보험 가입의 경우에는 악용의 사례가 있고 낸 것보다 더 많이 보장한다. 이 부분은 지속적으로 법을 바꾸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외국인들이 건강보험에 무임승차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한 말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무임승차’당하고 있는 한국 시민권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을 착취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이며, 한국 정부는 이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중국 눈치나 보는 무능한 국가가 된다.

국가는 우선적으로 시민권자의 생명을 돌보아야 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공공재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민권자를 다 돌본 다음에나 비시민권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님은 명확하다. 이러면 비시민권자의 차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제협약을 통해 비시민권자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 지금 경우처럼 한국에서 발병할 경우 한국이 책임지고 치료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메르스 사태 때 중국에서 발병한 한국인은 중국에서 책임지고 치료했다.)

문제는 이런 국제협약에 의해 보장된 권리까지 한국 시민권자의 세금을 축내는 민폐이며 무임승차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비시민권자는 아무런 권리도 없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존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세계에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한국인, 중국인, 미국인 등 시민권자/국민만이 존재하게 된다. 국민을 넘어서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이 ‘시민’권이 아니라 ‘인’권을 부정하는 논리가 된다. 형식적으로도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데 ‘인’권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권리(심지어 국제 협약에 의해 보장된 ‘외국인’으로서의 권리 혹은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 시민권자인지 아닌지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몇몇 혐오와 차별 담론에서 조선족은 한국 시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여기서 민족과 인종은 시민권을 넘어 삶을 위한 ‘자격’이 된다.

이렇게 되면 국가의 역할은 더 이상 시민권자를 돌보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생존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전자만 돌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격 없는 자의 무임승차를 방지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설령 그 자격심사가 자격과 상관없이 돌보는 것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통치는 살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살릴 자격이 있는가를 심사하는 데 있다.

이런 원칙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했었다. 나치 독일이다. 극단적이라고해서 예외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한 원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서구에서는 끊임없이 근대의 특징으로 나치를 연구한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나치가 추구한 것은 그저 ‘인종’이 아니다. ‘완벽한’ 인종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리안족이라고 해서 다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리안족으로서 완벽해야 한다. 따라서 ‘완벽한’ 아리안족의 조건을 따진다. ‘진짜’ 아리안족을 선별하는 것. 조금이라도 아리안족에 ‘흠결’을 가하는 존재는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만 ‘자격 없음’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다. 충성스런 친위대였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는 배제되었고, 장애인은 배제되었다. 그 ‘인종’에는 인종이라는 계보학적인 완벽함뿐만 아니라 ‘정상인’이라는 완벽함, 성적 정체성에서도 이성애자로서의 완벽함 등 모든 생물학적 완벽함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완벽함에 대한 이런 요구는 생물학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도덕적인 것을 포함한다.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총통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담론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조선족이 아닌 한국 시민권자는 모두가 다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시민권자의 자격도 따진다. 그가 과연 그런 권리와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확진되어 격리되어 있는 분들 중에서 증상이 있었음에도 외부를 돌아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세금으러 치료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다른 ‘선량한’ 시민권자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금으로 치료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시민권자이지만 도덕적으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금을 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을 축내는 ‘무임승차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들이야말로 또다시 극도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자격은 다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이처럼 자격은 결코 느슨한 것이 아니다. 자격은 완벽함을 요구한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는 모두 잠재적으로 탈락이고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내가 탈락하지 않기 위해 남의 ‘흠결’을 따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 시민과 시민 사이에 자격을 둘러싼 처절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이 아귀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자격심사관으로 완장을 차는 것이다.

모두가 나를 제외하고는 무임승차자이며 민폐이기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자격심사관 완장을 찬다. 완장을 차고 타자에게 선빵을 날리며 심사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 물론 내 완장에 대해 다시 완장을 찬 사람들이 곧 나타나 나를 또 심사하겠지만 말이다. 이게 어디 지금 ‘국민의 자격’에만 국한된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내가 혐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장에 저항해야 한다.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단속사회" 저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엄기호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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