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안태환]

우리 사회는 현재 3중 위기(경제위기, 기후위기, 인구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인구위기가 제일 심각하다. 왜냐면 이런 정도의 심각한 인구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혁명적 변혁이 필요한데 과연 가능할지 비관적이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기재부 장관 대신 보건복지부 장관이 부총리가 되었으면 싶다. 라틴아메리카는 청소년 인구도 많고 결혼도 매우 일찍(?) 하는 등,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선진국이다.

최근 <프레시안>에 실린 이상이 교수의 글이 호소력이 크다. “2017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는 매년 전년 대비 수만 명의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현상을 보고 한국을 '집단자살 사회'로 지칭했다. 한국이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극한적 상황이 아님에도 매년 전년보다 1-5만 명씩이나 덜 태어나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초저출산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단자살 사회의 자화상을 심각하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저출산 해법은 양질의 일자리, 지속적 경제성장, (공공적) 보육·교육, 일·가정 양립, 임신·출산, 가족·여성, 주거, 의료·요양 등의 제도적 보장을 포함한다.“(2020.2.3일자)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시작되었다면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보다 빨랐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금까지 너무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 베네수엘라는 1930-40년대부터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새마을 운동과 병행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이농현상이 1960-70년대에 이루어졌다.(이때부터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집단적이지만 실제로는 각자 ‘잘 살아 보세’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해외 수출의 경제개발에 성공(?)하면서 공장 등에 취직이 가능하여 도시가 나름대로 흡인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고 농촌주민을 그냥 도시로 밀어낸 것이다.

이때 농촌의 가난한 대중이 개별적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카라카스의 외곽에 있는 국유지 또는 사유지라도 주거시설로 개발이 되어 있지 않은 곳(집을 사고 팔 만한 상업적 가치가 없는 땅)에 ‘불법적’으로 모여 살게 된다. 2012년 현재, 카라카스 광역시 인구의 약 56퍼센트 이상이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작된 1980년대에 이들에 대한 경찰력이 집행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신들의 삶의 장소를 지키려는 도시빈민 대중과 토지를 재산 또는 자본으로 지키려는 부동산 기업들 사이에 갈등전선이 형성된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합법적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전자는 강제퇴거에 맞서 싸우는 집단적 투쟁력이 무기였다. 1980년대부터 빈민가의 주민들은 토지소유권의 합법화와 집단적 주거권을 위한 운동조직으로 도시토지위원회(Comite de Tierra Urbana)를 만든다.

도시토지위원회(Comite de Tierra Urbana) 로고. (이미지 출처 = lara902003.wixsite.com)

C.T.U 같은 조직이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차베스 혁명 이후가 아니라 그 훨씬 전인 1980년대에 이미 대중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차베스 정부는 단지 법적 제도적으로 이들의 요구를 사후에 승인했을 뿐이다. 2009년 현재, 도시토지위원회는 6740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요구가 개인 재산의 신성화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요구를 뛰어넘어 개인적 인권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인권으로 집단적 주거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은 베네수엘라만이 아니다. 1980-90년대에 걸쳐, 이같은 최소한도의 삶의 장소를 지키려는 도시 빈민에 의한 집단적 투쟁은 브라질,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같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펼쳐졌다.

라틴아메리카 빈민들이 쉽게 대중운동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맥락은 이들이 ‘동네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반대로 중산층 이상이 고급아파트 위주로 모여 살며 빈민들은 파편화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1990년 현재 베네수엘라에 동네 공동체가 약 1만 개에서 1만 2000개 정도 되고 카라카스에는 약 200개 정도 된다. 동네 공동체는 잘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는 거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바리오)에 있다. 집을 지을 때도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저축한 돈으로 조금씩 천천히 짓는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보다는 행상, 노점상 등 비공식 부문의 노동에 종사한다. 

자기가 ‘자기’를 고용하는 비공식 노동자로서 마르크스가 얘기한 자본과 노동이 결합하여 생산력을 늘리고 부가가치를 부여하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 지하경제의 노동을 통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공동체를 통해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시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도시의 다른 공간에 비해 훨씬 ‘동질적’인 동네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에 비해 역설적으로 설계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의 공간은 겉으로는 기하학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동질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동네 공동체는 시당국의 강제 퇴거 명령을 거부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1970년대까지는 동네 공동체가 있었지만 집단적 주거권을 주장하는 구체적 운동조직을 만들지는 않았다. 즉,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사회적 양극화와 배제가 심해지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무력하게’ 희생되고 있다면,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집단적 분노와 저항이 구체적 운동 조직 또는 새로운 집단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공공정책 또는 사회정책을 지속적으로 축소시키는 정치, 사회적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을 기존 제도, 즉, 정당, 의회, 노조를 통한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대중이 스스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보적 엘리트 지식인들이 대중을 깨워(계몽하여) 운동을 하는 우리의 방식과는 경로가 전혀 다르다.

그리고 대중 스스로가 힘 있는 대안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집단적으로 불법적으로라도 “토지‘를 점유하는 방식을 통해 ’영토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영토성이란 근대적 보편주의, 합리주의를 단절시키고 자신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문화를 지키고 시민 사회의 다른 부문의 논리와 대결하고 산다는 의미다. 이들은 가난하지만 ‘축제’적 정신을 가지고 산다.(살사, 메렝게, 바예나또, 란체라, 락, 힙합, 볼레로 음악 등을 즐기며.)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서로 연대하는 방법을 잘 안다. 왜냐하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자신들만의 독특한 투쟁과 연대적 삶의 방식을 ‘집단적으로’ 온몸으로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사회적 차이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방식 또는 경제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는 16세기부터 농산물, 광산물의 원료 공급기지 라면 우리는 1970년대부터 저렴한(경쟁력이 있는) 공산품을 수출하는 구조로서 거칠게 표현하면 그들은 ‘엉성하게’ 편입되어 자본주의 논리 외부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념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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