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나는 감기 앓는 것을 아주 즐겨 했었다. 청년 시절 본당 신부님이 나에게 감기란 ‘네가 충분히 수고했으니 이제 쉬어도 좋다는 신호다’란 말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김기림의 시에 나오는 “가마귀도 날아가도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란 구절이 전한 깊은 울림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감기가 걸리면, 약간의 미열과 오소소 떨려 오는 그 느낌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요즈음 감기에 걸리다는 것은 이런 감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번 신년부터 한 삼주간을 꼼짝 없이 감기로 끙끙 앓았는데, 겨우 나았다 싶다가도 수업 한 번 하고 나면 또 감기를 앓고, 또 좀 나았다 싶다가도 다시 감기가 걸리는 다소 짜증스런 상황을 반복하며, 낭패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감기기운이 있거나 열이 나면 제발 수업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학생들은 웃었지만, 난 내심 심각했다. 학교 전체에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교수실 복도에 기침 소리가 나면 자꾸 예민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얼른 짐을 싸 들고 집에 와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길에서나 카페에서 조심성 없이 기침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내 맘에 일어나는 적개심이었다. 내 맘속에 일어난 타자에 대한 이 부정적 감정을 성찰하다가, 이 미움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마치 미래사회에 대한 디스토피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하얀 방독복을 입은 사람들이 방역하고, 사람들을 검열, 격리시키고, 중국으로 가는 항공편들이 폐쇄되고, 확진자가 나오는 국가들은 그 수자를 축소 보고 하려 하고, 온갖 루머는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에 대해 유난히 예민한 사람들이 미국과 유럽인 것 같다. 

잉마르 베리만의 명작 '제7의 봉인' 중 주인공 기사가 의인화된 죽음과 장기를 두며 신앙의 의미를 알기 위해 시간을 버는 장면. (이미지 출처 = 백두대간)

나는 이번 여름방학 중에 열릴 종교간 대화에 대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한국에 가기로 한 동료 교수가 자기 학교에서는 중국과 한국에 하는 학술 활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다며 걱정스러워 했다. 또 새 학기에 중국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러 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세상은 세계화 경제로 인해 이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태가 연장되면, 작은 기업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또 고통받겠구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이나 유럽인들이 가지는 세균에 대한 공포는 흑사병을 겪은 그들의 트라우마에서 오는 것 같다. 나는 봄 학기마다 중세의 세계 문화를 가르치는데, 그 수업에서 꼭 한 번 짚고 넘어가는 내용이 흑사병(the black death)이다. 이는 14세기에 창궐했던 전염병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30퍼센트의 목숨을 빼앗아 갔으며, 중국에서 쥐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고 이야기한다. 그 사건으로 유럽의 종교, 사회, 문화는 대 변환을 겪게 되었는데, 특히  중세의 신관과 절대적인 종교적 신념은 회의를 가져다 주었고, 개인주의와 인본주의를 기초로 하는 근대가 시작되었다. 물론, 삶에 대한 불신으로 그저 죽을 때까지 즐기자는 퇴폐적인 모습도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조반니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이란 작품을 썼는데, 이는 흑사병을 피해 외딴곳의 별장으로 간 젊은이들이 매우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이야기를 매일 밤 들려주는 형식으로 쓰였다. 여기서 보면 유럽의 기초가 된 기독교의 권위가 무너졌음과 인간의 (성적) 쾌락과 자유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또한 잉마르 베리만의 명작, “제7의 봉인”은 십자군 전쟁 후 흑사병으로 초토화된 지역을 지나는 한 중세의 기사 이야기로, 죽음을 의인화 한 인물과의 체스 장면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 영화는 주인공의 신에 대한 회의와 함께, 이런 상황에서 구원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구원은 계속되는가 하는 질문을 다루었는데, 답은 가난하고 순수한 광대와 그 가족의 진정한 사랑과 순정한 친절이라 말하고 있다. 죽음과 싸우며 시간을 벌며, 그가 결국 확인한 것은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의 사랑이었다.

소셜미디어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차별을 겪는 중국 등 아시아 젊은이들이 올리는 "나는 바이러스가 아니라"라는 사인.

최근 유럽에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 아시아인에 거부가 눈에 뜨인다. 이탈리아의 어느 음악학교에는 한국인 학생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모든 아시안 학생의 등교를 거부했고, 파리에서는 중국인들은 꺼지라는 사인도 보인다. 그래서 소셜미디어에 “나는 바이러스 아니다 Je ne suis pas un virus”라는 태그가 많이 올라온다. 이 사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사라진 현실에 대한, 창의적인 저항의 메시지로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인종차별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살고 있는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비이성적인 인종차별 주의가 부활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사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맹목적 혐오에서 시작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빨리 신종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많은 사람의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지만,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잃게 되는 것, 잘 알지 못하는 타자에게 혐오의 시선을 두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확진자 0번이라고 호명되는 사람이, 단지 우리에게 죽음의 바이러스를 옮겨 줄지 모르는 어떤 불길한 번호가 아니라 같은 인간임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또 비이성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 친절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절실한 것 같다. 타자에게 두려운 시선을 향하지 말고,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일에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조금 천천히, 그리고 쉬어 가면서, 내 안의 면역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교회들도 다양하고 창의적인 반응을 해야 한다. 혜화동의 어떤 교회는 신자가 바이러스에 걸려서 문을 닫고 사이버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번 2월 새 사제 서품식에서는 미사 중 평화의 인사는 목례로 할 것을 권고하는 뉴스를 읽었는데, 정말 사려 깊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성찬의 신비에 깊이 참여한다는 것은 미사 중 포옹을 하고, 양형 성체를 영하는 차원을 너머 기도와, 전례 그리고 일상 안에서,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을 넓히고, 사랑하기를 배우는 일이다. 4차 기술 혁명 시대, 글로벌 자유 경제 시대에 우리가 대면한 이 위기는 사실, 신앙을 살아가는 나의 자세와 우리 신앙과 영성의 체화된 표현인 전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초대로 느껴진다.  

까뮈가 “페스트”라는 소설에서 썼듯이, 우리 주변에 흑사병은 늘 존재한다. 갑자기 우리 주변에 나타나, 홀연 생명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그로 인해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만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페스트 혹은 바이러스, 그것은 전쟁일 수 있고, 폭력일 수 있고, 내 맘에 자리한 욕심일 수 있으며, 때론 질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이 신종 바이러스라는, 우리를 압도하는 현상 앞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친절하며, 따스하게 사랑하기를 배우고 싶다. 우리는 이 신종 바이러스 앞에서 참 인간이 되는 법을 향해 한 걸음 더 진화해 가리라 소망해 본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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