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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내세우는 계명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기사승인 2020.02.13  15: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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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2월 16일(연중 제6주일) 집회 15,15-20; 1코린 2,6-10; 마태 5,17-37

지난해 10월에 개최했던 “아마존 특별 주교시노드”는 말 그대로 특별한 시노드였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이자 숨쉴 수 있는 생태계의 마지막 보루다. 이곳이 파괴되면 서로 연계해서 만들어 내는 산소의 동력이 파괴되고 이후 일어나게 될 모든 시나리오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마존의 중요성이 인류의 상식이 되었음에도 정작 아마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아마존을 지키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시노드는 “아마존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절규로 시작되었다. 아마존의 사람들은 아마존이란 문제에 끌려 들어간 부품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아마존의 무자비한 장사꾼들로부터 아마존을 지키는 자들이며, 아마존과 함께 살아온 아마존이다. 그들이 이번 시노드의 얼굴로 등장했다.

물론 아마존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아홉 개의 나라가 아마존을 둘러싸고 정치, 경제적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으며, 불법 벌목과 광산개발, 강제이주, 토지파괴를 비롯해 마약 밀매와 인신매매, 노동착취 등 온갖 비극적 범죄의 총산지가 되었다. 힘없이 노출된 130여 개 아마존 부족민들의 인권과 권리는 이미 오래전에 송두리째 무너졌다. 지금도 브라질이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아마존은 지난 5월에만 축구장 7000여 개 넓이의 열대 우림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이번 시노드는 아마존의 소리를 듣기로 하였고 “예언적이며 착한 사마리인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섰다. 

15세기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반강제로 가톨릭 세례를 받은 토착민들은 수세기 동안 그 땅과 함께 연명해 가고 있지만 제대로 된 조명을 받아 본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시노드가 처음 ‘그들’을 다루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동체 내에 덕성이 입증된 기혼 남성(viri provati)들의 사제서품을 허용해서 턱없이 부족한 사제 수를 보완하자고 절대다수가 찬성했다. 만약 이 서품이 허용된다면 수 세기 동안 잊혀 온 아마존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신앙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될 터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생겼다. 설상가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아마존 시노드에서 다룬 기혼 남성의 사제직 서품을 반대한다는 기사가 전파를 탔다.(1월 13일자) 반대 이유는 온갖 말씀과 미사여구로 열거되어 있을 테지만 속내는 지극히 뻔하고 단순하다. 천년 전 라테란 공의회(1123년)에서 제정된 독신남성 사제서품을 건드리지 말라는 결연한(?) 의지일 게다. 늘 그렇지만 거기에 무슨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존이 예리고의 강도를 만난 사람이라 해도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지 않는가. 독신제를 지키는 것이 사람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거다. 

2019년 10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마존 시노드를 폐막미사에서 봉헌된 식물을 받은 모습. (사진 출처 = americamagazine.org)

지난 2003-17년 브라질에서만 1100여 명의 토착민이 아마존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다른 지역, 여타의 사람들은 아예 통계 속에 들어오지도 않은 수치다. 이들이야말로 ‘아마존의 순교자’들이며, 이들 죽음의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 이들을 방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필적 고의의 제5계(‘살인하지 말라’)를 범하는 행위가 아닌가?

오늘 예수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전제 조건을 제시한다. 누구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마태 5,20)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의 의미는 유대 사회를 장악하고 움직이는 합법적 질서들의 정체를 다시 보라는 소리며, 당연했던 전통과 관습을 ‘당연시’ 여기지 말라는 소리다. 너희가 당연시해서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일이 실은 더 큰 살상을 불러오는 일이 될 것이며, 더 많은 소수자를 배제하고 약자들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행위가 신에게 가하는 폭력이요, 배신임을 명백히 알라는 소리기도 하다.

처음 이스라엘에 주어진 십계명은 차가운 금기의 법령이 아니었다. 이 계명의 진짜 속내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자신이 어떤 신인지를 알게 하는 데서 드러난다: “나는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탈출 20,1-2)이다. 그래서 십계의 7할은 사랑과 신실로 너희를 보호하고 이끈 주 하느님이 앞서 나오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5계에서 10계는 아주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들 계명은 짤막하지만 앞선 신의 정체성을 떼고는 설명될 수 없다. 누구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어떤 명분, 어떤 이유로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 계명은 제3계인 안식일 법과 연계되어 있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만들고, 강복하고, 거룩하게 한 날”(10-11)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 비전이 담긴 날이다. 어떤 차별도, 위계도 두지 않는 날, 모두가 제 모습대로 안식을 취하는 날, 그런 ‘때’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명의 본질이다.

예수는 십계명의 본질을 배신하고, 계명의 실제 얼굴을 지우면서 또 다른 법계와 법계의 법계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쫓겨난 이들을 기억했다. 예수는 생전 법조문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태어난 것 자체가 저주라고 배운 사람들, 때로는 공동체로부터, 때로는 성전 밖으로 내모는 계명의 금기들을 소환했다. 그는 계명의 아류를 만들고, 그 아류에 편승해서 급기야 신이 된 자들을 재판정으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 이렇게 판결문을 주문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갔다.”(마태 25,45-46)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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