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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기사승인 2020.02.18  13: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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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 구영주]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창비, 2019

이 책의 첫 장을 읽을 때만 해도 우리 사회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권리가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향상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문제가 이렇게 책으로 나온다는 것은 의식 있는 개인들과 그런 의식을 가진 개인들이 집단이나 공동체를 이루어 사회 전반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내 개인의 안온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사건이 막 이슈로 떠올랐다. 한 가지는 트랜스젠더 여성 군인 문제와 얼마 전 문제가 된 모 여대 트랜스젠더 학생의 입학거부가 그것이다. 기막힌 타이밍이었고 우연의 일치였으나 이것은 필자에게 무척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선 이 두 가지 사안의 결말에 절망했다. 책을 통해 문자화되고 활자화된 이상적 개념들이 생활 속에서는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들은 이 사회에서 말 그대로 그저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여전히 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해 배타적이며 혐오와 차별을 자행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철저하게 남성의 공간으로 여겨져 왔고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성 전환자에게는 더더욱 허용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 줬다. 모 여대의 결정 역시 마찬가지다. 성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공간에서 또다른 차별이 이루어졌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는 여성들 중 생각보다 많은 수가 트랜스젠더를 같은 여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이라는 1차원적 사고에만 머물러 있었으며,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본질인 ‘약자에 대한 이해’가 없는 또 다른 권력을 양산하는 위치를 스스로 만들었다. 이는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지향점에 있어서도 지극히 모순적인 일이다.

책에서는 동성애, HIV감염,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일상과 그들이 겪는 불평등한 노동권에 대한 비참한 현실들을 이야기하지만 책을 통하지 않고도 맞닥뜨린 작금의 상황들은 책보다 훨씬 더 매섭고 차갑다. 결국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 전환한 트랜스젠더 군인은 그토록 자신이 희망했던 군인이라는 직무에서 강제 전역을 당했다. 모 여대를 지원해 합격한 트랜스젠더 학생 역시도 대대적인 여학생들의 입학거부로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창비, 2019. (표지 제공 = 창비)

우리나라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을 2006년 법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성전환으로 인한 성별 교차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실제로 두 사람은 군인과 학생이라는 직업과 사회활동에 큰 제약과 차별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모 여대 입학거부를 당한 학생에게 가한 위협과 폭력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자행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사건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내포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대표적인 혐오 대상이다. 대부분의 혐오는 자신이 특정집단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거나 직접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그 집단이 정의의 기준에 어긋나는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다. 과거 남성이나 백인에 의해 무시받은 여성과 흑인의 인권이 성장하면서, 남성이나 백인 사회는 자신들의 권리와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자 여성과 흑인에게 혐오를 표출했다. 사실상 모 여대의 입학거부 역시도 차별에 대한 역차별로서 같은 맥락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으로서 권력을 누려 온 사람이 왜 굳이 여성의 위치로 들어오는가! 그가 학교에 들어옴으로써 우리 여성들의 권리와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생존의 문제로까지 확대한다.

같은 여성으로서 필자도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입장, 그들이 주장하는 억압과 차별받아 온 생물학적 여성의 위치와 사회적 위협들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이번 사안을 조금 다르게 봐야 할 문제 같다. 여성으로 성 전환한 남성이 여성의 공간에 들어온다고 해서 여성들만의 공간이 무너질 거라는 것은 어찌 보면 지나친 우려다. 그것은 진정 남성의 세계에서도 고립되고 여성의 세계 속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트랜스젠더들, 즉 가장 힘없는 소수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이다. 이는 차별받은 이가 하는 또 다른 역차별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생물학적 성별’을 기준으로만 동질성을 이야기하고 여기서 벗어난 이들을 배제할 때 남성 중심사회가 규정해 놓은 여성에 대한 규범은 더 공고해진다. 기존 가부장제가 지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더욱더 견고하게 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차별과 억압받아 온 여성들이 ‘우리도 인간’임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권리와 인권을 주장해 가부장적 권력에 의해 약탈당한 자신들의 위치를 끌어올리겠다는 운동이라면, 지금 모 여대에서 주장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는 역으로 자신들보다 더 약자인 트랜스젠더 여성을 차별하고 배타하는 것으로밖에는 비쳐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차별과 배타를 자신들보다 더 힘없는 소수자들에게 자행하는 일이다.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은 것처럼 단지 그들이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이유로.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예쁜 옷 입고 화장을 하고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 당신이 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을 때 그것들을 설명한 언어가 없다. 자신의 느낌,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회적 여성성이 요구된다. 그들이 보여 주는 여성성을 탈 코르셋한 페미니스트들은 경멸하고 그들이 여성성을 그런 식으로라도 증명하지 못할 때는 네가 남자라서 그렇다는 말이 돌아온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할 언어도 없이 그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자기 정체성을 다양하게 증명하려 애쓰는 이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없는 이들보다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세상에서 더없이 적은 소수자들에 대해 지나친 혐오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차별받은 자가 자신보다 더 약한, 즉 자기를 증명할 언어조차 없는 가장 낮은 자리의 소수자들을 다시 차별하는, 그래서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고 후퇴시키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는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며 성소수자들 역시 단순한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어필하는 정도의 가벼운 수준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이들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하고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무수한 시간 동안 피 마르는 내적 갈등을 겪는다.

사실상 가장 사회적 약자는 어느 성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이 태어난 본래의 성과 의식화된 자각의 성이 다를 때 느끼는 극도의 혼란, 정체성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이 아닐까.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로 우리가 정의 내려 버린 그들은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그동안 우리 한국 사회에서 알고 있는 모든 소수자와 퀴어 문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지금 사회적으로 대두된 성소수자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수준까지 올라왔음을 시사한다. 성소수자 문제는 더 가시화 될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고 이런 사안들은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날 것이며, 사회는 그들의 드러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가 변해야 한다.

성소수자들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자괴감보다 자신들이 어렵게 찾아낸 정체성을 혐오하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림받는다. 그들은 혐오와 차별로 점철된 일상을 살고 위태로운 노동환경 속에서 불안한 사회적 존재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 나간다.

과거 에이즈 같은 성병이 동성애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편견은 더는 의학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규정되었으나, 동성애자들이나 기타 소수자들에게는 여전히 편견이 있다. 그것이 정신적, 정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심지어 하느님에게서 벌을 받고 있다는 식의 중세적 종교 관념들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반인들의 이런 무지에서 오는 차별에 더해 이번 사태는 같은 약자 같은 소수자들 사이의 싸움으로까지 가는 듯해 무척 착잡한 마음이다. 이들은 다시 한번 이중 삼중의 고통을 떠안는다.

같은 여성이라도 분명 다른 위치성을 가진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남녀 성의 대결 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 남성이라도 차별받는 이가 있다면 그들이 차별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여성이 차별받는다면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 외에 여러 다층적인 이유들을 함께 봐야 하듯 소수자들의 차별 역시 그런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이 책의 일독을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동시에 이 책을 기본으로 일상 자체가 차별과 혐오로 점철된 소수자들의 삶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같은 처지의 약자들 사이에서의 차별과 배타 또 다른 역차별을 좀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존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고 예외가 되어서도 안 된다. 게다가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고유함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빨간색으로 누군가는 파란색으로 누군가는 보라색으로. 다양한 색이 있어서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에도 수많은 개개인의 다양성과 각자의 정체성이 서로 존중받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세상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색깔이 인정받고 나와야 하며, 다양성을 가진 많은 사람이 그들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본질적 추구는 결국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차별받는 모든 인간, 소외받는 모든 인간, 배척받고 혐오당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똑같은 생명을 부여받은 모든 생명이 추구해야 할 가장 온전하고도 인간적인 삶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한다. 이제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를 넘어 더 큰 사고와 의식의 경계까지를 넘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제 우리는 페미니즘을 넘어 휴머니즘으로 가야 한다고 말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구영주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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