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오늘 우리 사랑을 선택합시다”

교종, 2월23일 연중 제7주일 이탈리아 남부 ‘바리’ 미사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23일 연중 제7주일을 이탈리아 남부도시 바리에서 지중해지역 국가 주교들과 함께 미사를 집전했다. 교종은 이날 강론을 통해 마태오 복음 5장 38-48절 내용을 설명하면서 지중해 지역에 평화와 사랑이 넘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 오늘 “사랑을 선택하자”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고대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으로 자기에게 잘못한 이들을 되갚음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폭력을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심으로써 복수에서 용서라는 사랑으로 넘어갔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비폭력을 행한다고 해서 ‘악인이 원할 것’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대율법을 넘어서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사랑에 보답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을 계속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설교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고한 자신을 정죄하고 잔인한 죽음에 처하게 한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 십자가에서 팔을 펼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이고 명확하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제시한 유일한 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라는 예수님 말씀은 명확합니다. 예수님 사랑에는 경계, 장벽이나 범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예수님 요구를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극단주의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극단적 자선’입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기도하십시오. 사실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그런 요구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달성하기가 어렵다면 은혜를 간청해야 합니다. 다른 일들에 대해 하느님 도움을 구하는 것 외에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기도하십시오! 

복음의 본질을 살기 위해서는 더 자주 기도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삶의 밤에 우리는 사랑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빛과 사랑의 말씀에서) 오늘 당장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자비’이신 예수님의 도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상은 더 인간적이 될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

교종, 바리 지중해 연안국 주교회의 연설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23일 이탈리아 지중해 남부도시 바리에서 지난주 ‘지중해 평화의 국경’ 주제로 열린 지중해 연안국가 주교회의 마지막 날 19개 연안국가 주교들에게 연설을 통해 전쟁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광기’라고 규정하고 서로의 장벽을 쌓지 말고 많은 사람이 아무런 도움 없이 바다에서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조했다. 

연설 요약.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 기쁘고, 여러분 모두 지중해 교회를 구성하는 회의에 이탈리아 주교회의 초대를 수락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바쎄티 추기경님이 저에게 이 회의를 제안했을 때, 저는 세계의 중요한 지역의 평화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수락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대표하는 새로운 형제애와 공동체 모델의 중요성에 참석하고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이 도시가 중동 및 아프리카와의 연계에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회의가 열린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리 교구는 지중해 지역의 상호존중과 형제애 유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일치운동과 종교간 대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저는 1년 반 전 이곳에서 중동 기독교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나 함께 여행하고 더 가깝게 느끼도록 돕는 토론과 친교를 가졌습니다. 이곳은 2013년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작전(주: 2013년 하반기 유럽으로의 이민증가와 람페두사 철거선 해결을 위한 이탈리아 정부의 1년에 걸친 해상과 항공작전)으로 다양한 사람이 만난 물리적, 정신적 장소입니다. 이 바다는 지리적 조건으로 주변국 사람과 문화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이 지역이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세계화 과정에서도 이 지역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계화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흐름의 교차로로서 지중해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지중해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르지오 라 피라의 말처럼 지중해 크기는 바다라기보다 호수처럼 보이지만 중요성은 그에 반비례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대형 갈릴리 바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문화와 신념의 맥락에서 살았고 일했던 것처럼 우리도 불안정으로 이끄는 불평등 형태로 상처 입은 다각적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많은 결점과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우리는 연합과 평화를 증거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지중해지역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공헌을 모색하고자 모였습니다. 지중해의 유산은 교리교육과 성찬, 양심의 형성, 그리고 주님 말씀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헌신에 의해 양육되고 보존되고 살아 있습니다. 

특히 대중신심 덕분에 그리스도인 경험은 의미 있고 지속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대중의 헌신은 대부분 솔직하고 진실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 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잠재력 중 하나는 믿음의 내용과 문화적 보물 및 아름다운 예술품이 결합된 종합예술입니다. 이 유산은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방문자를 계속 끌어들이고 있으며, 미래 세대에게 전달될 소중한 유산으로 신중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중해 지역은 중동 및 북아프리카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 종교 또는 집단 사이에서 불안정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전쟁은 자원을 무기와 군사력 취득에 할당함으로써 가족의 복지, 건강관리 및 교육과 같은 중요한 사회적 요구를 외면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광기입니다. 인간과 경제관계를 구축하는 대신 집, 다리, 공장과 병원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자원을 멸절시키는 것은 광기입니다. 전쟁은 결코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고, 이해의 차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질 수없는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인간사회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입니다. 실제 우리는 ‘모든 일에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착취와 패권에 대한 모든 시도는 이러한 목표를 모두 무시하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은 없다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인간과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실패입니다. 증오의 결과로 아름다운 정원이 어떻게 황폐한 풍경이 되는지, 지상낙원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하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전쟁터였던 시골이나 도시를 방문하면 됩니다. 교회와 모든 시민단체가 항상 최우선 과제로 생각해야 하는 평화는 정의를 불가결한 조건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람들을 마치 사물인 것처럼 대우하고 불평등을 발생시키고 조장하는 문화에 의해 차단됩니다. 

이 바다 기슭에는 엄청난 부가 있는 동시에 많은 사람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 문화에 대항하기 위한 기여는 기독교 공동체가 수행하는 수많은 자선과 교육사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복음은 더욱 강력하고 매력적으로 변합니다. 지중해 지역에는 전쟁에서 도망치거나 인간의 존엄한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난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땅을 버리고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형제자매들의 수는 갈등이 퍼지고 환경과 기후조건이 열악해짐에 따라 증가했습니다. 이 현상은 지중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예상되며, 국가와 종교 공동체가 준비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무관심과 거부에 대한 태도가 커지고 있으며, 많은 복음 비유에서 정죄받는 자신의 부와 자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정신을 반영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눈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명의 충돌에 대한 수사학은 단지 폭력을 정당화하고 증오를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정부지도자들이 소수민족과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라고 요구하도록 말씀하십시오. 한편, 바다를 통해 희망을 찾는 사람은 도움을 받지 않고 죽을 수 있거나 성적 착취에 빠지거나 갱단에 의해 피해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결코 외면하면 안 됩니다. 

확실히 수용과 위엄 있는 통합은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벽을 세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지중해는 이와 관련한 독특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항상 만나고, 대화하고 상호 성장하기 위해 열려 있는 문화입니다. 지중해 지역의 일부가 되는 것은 놀라운 잠재력입니다. 민족주의 정신이 반대 견해를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대화는 인류학뿐 아니라 신학적 관점에서도 유리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을 듣는 것은 사랑의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가 종종 진리를 구속하려는 유혹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영을 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환대의 가치를 알게 합시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선포로 이어지는 수용과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첫발을 내딛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진리의 씨앗을 배제하지 않는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자주 우리와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을 대적하여 하느님을 변호한다는 왜곡된 개념에 근거해 갈등과 투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극단주의와 근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종교적 자유를 부정하며, 도덕적 쇠퇴와 인간관계에 대한 적대적 관점의 확산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또한 다른 종교적 고백 사이에서 더욱 진지한 존중과 평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동기의 필요성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의 유익하고 위로가 되는 만남이 끝날 때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저의 희망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위험과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지중해를 처음으로 건넌 사도 바오로의 중보에 여러분들을 맡깁니다. 그의 모범이 우리 시대의 신앙을 전하는 즐겁고 해방적 임무에서 추구해야 할 길을 보여 주길 바랍니다. 또 저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여러분과 각 지역사회에 희망과 힘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유배된 뒤 예루살렘이 멸망되는 것을 목격한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폐허가 된 도시들과 여러 세대의 황폐한 땅을 고칠 것이다”(이사야 61,4) 이것이 사랑하는 지중해지역을 대신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에 동반하시고 화해와 평화의 사역을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

교종, 2월2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는 교종은 2월2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이날 복음(마르 8,27-33)을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는 바로 우리들에게 하신 질문이며,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세 단계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택하신 길을 깨닫고 증거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복음을 읽거나 자녀들을 교리교육에 데려갈 때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첫 번째 단계일 뿐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능력, 즉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도 성령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말하고 고백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분이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을 청해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그분이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그분을 아는 세 번째 단계를 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31절 참조)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이시다”라고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택하신 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 구속을 위해 택한 굴욕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닐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거리를 두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탄을 자신의 ‘증인’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이란 겸손과 굴욕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이 길을 따르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이며,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를 지녔지만 종교를 사회적 개념의 맥락에서 친절이나 우정과 혼동하는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또한 많은 성직자가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명예, 사치, 세속의 길을 걷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만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지만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길,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도 이런 식으로 살았던 많은 주교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 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속적인 교종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길이 그리스도인들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관된 은혜,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은혜, 심지어 굴욕을 요구하는 은혜를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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